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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인간 생활의 주어(主語)다
 
또 한 해를 아무런 보람 없이 그냥 흘려보냈다는 생각 때문일까. 세모가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진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듣게 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방울 소리, 지하도 입구를 지키는 걸인의 터지고 갈라진 손에서 들리는 소리없는 외침이 그런 내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근로는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다. 게을러터져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무를 지키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빈둥거리는 사람도 있다. 빌어먹을 국가는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키지 않을 때, 무작정 저 걸인을 나무라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적선하는 게 옳지 않을까.
 
"내 거지 근성 때문인지도 몰라 ; 나는 너의 그 말 한마디에/ 굶주려 있었단 말야 : / '너,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어 주는 거(시 '성(聖)찰리 채플린' 일부)"라고 말하는 황지우 시인의 시에 크게 공감을 표시한 적이 있다.
 
정말이지 살다 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에 목매달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늘 엇박자로 움직이는 게 세상이다. 배가 고플 때 술을 사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술이 마시고 싶은데 자꾸만 밥을 먹자고 하는 친구도 있다. 정말 허기졌을 때의 밥 한 그릇은 세상의 어떤 은혜보다 막중한 것이다.
 
세상에 "같이 밥 먹자"고 하는 말보다 더 정답고 반가운 말이 있을까. 밥은 인간 생활의 주어(主語)다. 그밖의 모든 것은 술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밥은 인간뿐 아니라 부처님에게도 주어인지 모른다.
 
지극정성으로 올리는 공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행 가서 절집에 들르면 석탑이나 석등 속에 새겨진 공양상이나 주악상을 보게 된다. 따지고 보면 주악상도 공양상이다. 정신의 배고픔을 채우는 거니까. 사찰을 장엄하는 문화재 가 많지만, 난 유독 공양상이나 주악상을 좋아한다. 아아, 돌부처님도 밥을 먹는구나. 아마도 그렇게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공양상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다. 공양을 올리는 자의 정성과 겸손함을 보라.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한쪽 무릎은 곧추세우고 나서 한 손으로 주발을 받치면서 공손히 공양을 올리는 모습.
 
사실 공양을 올리는 자의 정성과 겸손함은 탑 속에 저렇게 공양상을 새겨넣은 석공의 것이다. 어느 소재보다 돌이란 다루기 어려운 것이다. 자칫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간 그대로 돌덩이가 떨어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공양상만 베리는 게 아니다. 공양상을 새겨넣으려던 탑까지 사그리 베리게 되는 것이다. 공양상에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돌을 새겨나가는 옛 석공의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다.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한량없는 부처의 공덕
 
 
자, 육체의 공양을 드셨으면 이번엔 정신의 공양을 드실 차례다. 그래서 공양상과 주악상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은지도 모른다. 주악상이란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을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말한다.
 
음악 공양에 사용되는 악기는 공후, 생황, 비파, 장구, 배소, 나각, 젓대, 피리 등이다. 주악상을 바라보노라면 돌 속 인물이 연주하는 소리가 돌을 뚫고, 아득한 시공을 넘어서 내게로 전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공양을 받는 분은 부처님이지만, 정작 배가 부른 것은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하나의 행위에 부처와 공양을 올리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등 3자가 동시에, 함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공양상이 설(說)하는 하심(下心)과 자비를 배우고 싶다. 올 연말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저 석탑 속 인물의 마음가짐으로 지나고 싶다. 그러면 아무 보람 없이 한 해를 허송해버린 자의 허전한 마음이 조금치라도 채워질까.

태그:#공양상 , #주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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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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