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복궁 흥례문. 이곳에 살았던 조선 군주들은 왜 500년 내내 여진족(만주족) 콤플렉스를 느꼈을까?
 경복궁 흥례문. 이곳에 살았던 조선 군주들은 왜 500년 내내 여진족(만주족) 콤플렉스를 느꼈을까?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조선왕조의 국제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한 가지는 동북방 여진족(만주족)에 대한 끊임없는 콤플렉스였다.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와 연합하여 광적인 여진족 토벌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남쪽의 일본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했고, 조선 후기에는 중원의 새로운 챔피언 청나라를 애써 무시하면서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 자처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과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느 일본사 학자의 말에 따르면,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 관군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당시 조선군의 전투방식이 기마병대와의 싸움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명장들인 이일(李鎰)과 신립이 상주전투 및 충주전투에서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한 것은, 기마병대와는 전혀 다른 일본군의 전투방식이 낯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학자의 지적이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이 주로 기마병대 특히 동북방 여진족과의 싸움에 익숙한 군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병자호란(1637년, 국사교과서의 1636년 표기는 오기)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조선은 여진족이라는 존재를 꽤 많이 아니 유별나게 의식하고 있었다. 여진족 못지않게 무서운 적인 일본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할 만큼 조선은 여진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럼, 조선이 그처럼 여진족 콤플렉스를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진족에 비해 문화적 우위를 갖고 있던 조선이 왜 조선왕조 500년 내내 여진족 혹은 만주족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꼈던 걸까?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만 놓고 보면 그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조선이 그런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여진족을 군사적으로 압도하던 조선 전기에도 조선은 끊임없이 여진족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여진족 콤플렉스를 이해하자면, 병자호란 이외의 다른 요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선이 왜 그처럼 여진족 토벌전쟁에 매달렸는가와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은 이성계 정권이 쿠데타 정권이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쿠데타 정권이라서 정통성이 약했기 때문에, 강대국 명나라의 여진족 토벌전쟁에 협력하여 성과를 올림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는 견해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왕조가 이전 왕조로부터 불법적으로 권력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유독 조선왕조만 쿠데타 콤플렉스를 느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콤플렉스가 강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수백 년간 지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안정되면 정통성도 새로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조선왕조는 여진족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일까? 단순히 병자호란 때문만도 아니고 또 단순히 쿠데타 정권이기 때문만도 아니라면,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에 등장할 당시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어디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지금의 함경도에서 강대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함경도라는 지역은 본래 한족(韓族)의 거주지역이 아니었다. 그곳은 여진족의 거주지역이었다.

단순히 함경도 지역에 살기만 했던 게 아니라 그 지역에서 대대로 거주하면서 막강한 군사적 기반을 갖고 있던 집안이라면, 함경도에 거주하던 여진족 민중들과 ‘무언가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성계 집안이 여진족 민중들과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였다면, 그들이 그 지역에서 그 같은 세력기반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태조실록>에서는, <용비어천가>의 “육룡이 나라샤”에서 그 육룡 중 하나인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본래 전주 출신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조실록>에는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 있었을 때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전주에서 동북방으로 이주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전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동북방으로 이주할 당시에 이안사를 따른 세력이 170여 가(家)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는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 살았을 때에도 상당한 세력기반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1가(家)는 오늘날의 핵가족이나 대가족보다도 훨씬 더 큰 개념이었다. 그것은 가족 외에, 경제활동에 동원되는 종복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호적상의 개념에 그친 게 아니라 일종의 경제적 개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170여 가가 이성계 집안을 따라 동북방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 살았을 때부터 상당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태조실록>의 표현처럼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서 그 정도의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면 그곳에서 무언가의 발자취를 남겼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서 남긴 발자취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냥 전주에서 그 정도의 세력을 이끌고 동북방으로 옮겨갔다는 식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는 이성계의 가계(家系)에 관한 <태조실록>의 기록이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성계 집안이 정말로 전주 출신인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태조실록>의 편찬에 영향력을 행사한 조선 군주들이 태조 이성계의 출신에 대해 뭔가 숨기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성계가 감추려 한 것이 무엇인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진족 거주지역인 함경도에서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개성의 중앙무대에 진출한 이성계는, 누가 보더라도 여진족 군장으로 인식되기에 혹은 그런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이성계가 진짜 여진족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하다는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 여하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역사에 등장할 당시의 이성계가 여진족 거주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여진족은 고려인들에게는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말선초의 혼란기가 아니었다면, 또 이성계에게 그만한 무력이 없었다면, 이성계의 출신은 그의 출세가도에 분명히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새로운 왕조의 창업자가 된 이성계가 자신의 출신 콤플렉스를 극복한 방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조선은 한중관계사상 ‘최악의 사대정권’이었다. 조선처럼 중국에 사대한 왕조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는 만큼 여진족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악랄’하게 행동했다. 조선은 여진족 군소 세력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명나라와의 공동 군사작전에 막대한 에너지(특히 경제적 자원)를 소비했다.

이 대목에서, 한때는 그 자신도 ‘빨갱이’였다가 나중에는 그 누구보다도 반공을 더 열심히 부르짖은 박정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처럼, 조선왕조가 여진족 토벌전쟁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배경에는, 왕조 창업자 이성계를 여진족 출신으로 의심케 할 만한 움직일 수 없는 정황 증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콤플렉스는 병자호란 이후에는 ‘소중화’ 의식으로까지 계승되었다. 열심히 ‘멸공’을 외침으로써 스스로 ‘빨갱이’와의 거리를 두려 했던 박정희가 또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이성계의 출신이 여진족이었나 한족(韓族)이었나 하는 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건국 시기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여진족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왕으로 옹립할 만큼 종족이나 민족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단일민족 신화에 얽매인 20세기 이후의 한국인들과 달리, 종족이나 민족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 거주지역에서 왔다는 것이 정치적 출세에 불리한 요소이기는 해도 그것이 이성계를 민족적으로 배척하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여말선초 시기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여진족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긴 했어도 그들을 ‘남’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여진족들도 큰 틀에서는 ‘우리’라는 범주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런 사회적 인식이 없었다면, 여진족 출신이라는 의심을 받을 만한 이성계가 아무리 군사력이 강했다 하더라도 한족(韓族)들의 지지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왕조가 항상 여진족 콤플렉스를 느낀 것은 자신들이 ‘우리의 범주에 포함되긴 하지만 한족(韓族)들에게 미천한 존재로 치부되는 여진족’ 출신으로 의심받을 만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콤플렉스를 배제하고서는, 조선 전기의 광적인 여진족 토벌전쟁이나 조선 후기의 ‘말도 안 되는’ 소중화 의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여말선초 시기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민족구성이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여러 민족 혹은 종족들이 함께 거주했다 하더라도 어차피 다 한반도나 만주 출신이었지만, 지금은 저 먼 동남아인들까지 한반도에서 하나의 생활공동체에 편입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히 밥을 축내는 존재가 아니라 한국의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이미 한국인들과 ‘한 식구’가 된 사람들도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때일수록, 20세기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단일민족 신화에 얽매이지 말고, 여진족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왕으로 떠받든 조선 초기의 사람들처럼 보다 더 폭넓은 인식을 갖는 게 필요할 것이다. 혈통에 얽매이지 말고, ‘나와 운명을 함께할 만한 사람들’을 ‘우리’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범주에 다양한 혈통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강력하고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의 경험만 공유하는 단일민족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복합민족이 보다 더 강한 한국을 건설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을까?


태그:#단일민족, #여진족, #이성계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