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두막 골조 서두르지 않고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 꿈은 이뤄진다.
오두막 골조서두르지 않고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 꿈은 이뤄진다. ⓒ 정부흥

당뇨병을 앓는 내가 당뇨병은 '삶의 축복이다'라고 한다면 어리둥절하겠지만 어떤 측면으로 보면 분명히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수 있다. 오늘 아침 나의 혈당 수치는 139mg/dl이다. 정상 수치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편이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마시려면 목숨을 내놔야 한다. 의지로 버티지 못하면 아예 목숨을 담보로 먹고 마시라는 섭리이다. 그래서 수행자 같은 생활을 강요받는다. 잠시 옆길로 들었다가도 바로 되돌아와야만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

당뇨병 덕에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유사임사체험(죽음에 이른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하는 것)을 하였다. 가끔 자신이 방만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되돌아가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의 본 자리가 되었다. 육체의 눈을 닫으면 마음의 눈이 열린다. 당뇨병은 육체의 눈을 닫는 데 도움이 된다.

민박집 주인 내외 분들은 친환경 된장과 두부 제조공정 체험관으로 운영하기 위해 지은 아직 개관도 하지 않은 60평짜리 초대형 한옥을 우리에게 민박 장소로 제공해 주셨다. 우리보다 5~6년 손위분들로 자상한 형님과 누나같은 분들이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우리들이 안쓰러웠는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둘러보신다.

굴착기가 고장 나서 다른 할 일이 없다. 목재를 원하는 규격으로 자르고 다듬는 작업을 창고에서 시작했다. 전동공구는 그 소리가 대단히 시끄럽다. 특히 대패는 그 정도가 더하다. 집사람이 주인댁에 폐가 될지 모르니 저녁에는 공구를 사용하지 말자고 한다. 방으로 들어와 오두막의 전면도·측면도·배면도를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9월 25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날이다. 조상께 추수감사를 드리는 의식으로써의 의미가 퇴색된 감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 민족의 첫째 명절임에는 틀림없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뵙고 어제저녁 늦게 돌아온 아들은 나를 대신하여 작은아버지들과 고모를 만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성묘하러 백양사로 떠났다. 자식의 의미가 새롭다.

지리산 객지에 와있다고 조상에 대한 차례까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집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어제 산동 장터에서 사온 음식들로 제물을 준비한다. 어제 내린 비로 집터로 오르는 길은 다시 팥죽 길이다. 집사람은 집터에 오르는 공터에서 차례를 지내자고 했다.

조상님들을 집터 한가운데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비탈지고 험한 길을 합판 한 장을 들쳐 메고 집터 중앙으로 올랐다. 비닐포장에 대나무 기둥을 새워 천막을 치고 주변에 돌을 골라 상다리를 만들고 양탄자로 합판을 덮었다. 그 위에 제물을 차리니 그런대로 조상님들께 송구스런 마음이 조금 엷어지는 것 같다.

동생들이 백양사 영각당에 모셔진 부모님께 성묘가 끝났으니 나를 보러 지리산으로 온단다. 한 시쯤 됐을까 집터 아래쪽이 시끌벅적하다. 열댓 명이나 되는 대가족 이동이니 그럴 수밖에…. 온 친척들이 모여 차례 음식으로 음복했다. 나이가 들어가면 이런 재미가 크다.

집사람이 한 가족당 비닐자루 하나와 밤 줍는 장갑 두 켤레씩 지급한다. 밤 줍는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실시'를 명하자 온 산골이 시끌벅적하다. 산 아래서 우리가 없을 때 농장을 봐주는 할아버지께서 큰소리를 치며 쫓아 올라오시다가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가신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각각의 자루에는 잘 익은 밤알들이 가득 찼다. 집터까지는 간신히 끌고 밀고 왔으나 집터 밑 도로까지 옮기는 게 걱정인 모양이다. 못 가지고 가면 굴착기도 고장 나서 옮겨줄 수 없으니 놔두고 갈 수밖에 없다고 하자 무거운 밤 자루들이 번쩍번쩍 들려 남편들 어깨 위로 올라간다.

9월 26일, 아침에 일어나니 상쾌한 기분에 어울리게 날씨가 아주 좋다. 시골 사람들은 밖에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해뜨기 전∙후 한 시간 정도를 소중한 시간으로 여긴다. 나도 나이 들어가면서 일찍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산동면이라 그런지 이곳에선 동쪽을 향해 좌선에 들어가면 좀 더 깊이 자신을 둘러볼 수 있다.

전동 대패로 기둥다듬기  재목의 거친면이 거듭나는 모습을 보면 목수일은 작은 창조라는 생각이 든다.
전동 대패로 기둥다듬기 재목의 거친면이 거듭나는 모습을 보면 목수일은 작은 창조라는 생각이 든다. ⓒ 정부흥


식사 후 일찍부터 전동공구 소리를 내기도 뭐해 느지막하게 치목에 들어간다. 기둥과 서까래의 치목을 끝냈다. 거친 목재 표면을 다듬기 위해 대패질을 시작하였다. 기둥 하나 대패질을 끝내고 다음 기둥의 대패질을 하고자 하나 대패가 작동하지 않는다. 동력 연결벨트가 눌어붙어 버렸다. 오랫동안 진열품으로 방치한 탓에 고무로 된 벨트가 삭아버린 모양이다.

이제는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굴착기는 고장 나버렸고 대패마저 벨트가 눌어붙어 작동하지 않는다. 굴착기를 수리하고 대패를 교환할 수 있는 날까지 대전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 휴가기간이라도 아끼는 것이 상책이다. 잃어버린 시간과 돈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아직도 버려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떠나야 할 때를 준비한다는 미명 아래 더욱 짐을 늘려가는 내 모습이 작고 가련해 보인다.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덧붙이는 글 | 자신의 경험담입니다.



#목수#오두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