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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학선이 선창에 닿으면 아이들은 바쁜 일도 없는데 방파제를 뛴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들이 느긋하다. 선창에 마을트럭이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이 트럭은 봉통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때론 마을버스가 되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운송 트럭이 된다.

선창에서 봉통으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트럭은 사람을 만나면 손을 들지 않아도 선다. 화물칸이든 운전석 옆이든 비어 있는 공간에 사람이 오르면 출발한다. 여객선을 타면서 마을에 미리 연락하면 누구든 시간 나는 사람이 끌고 선창에 나오는 마을 전용 교통수단이다.

이 길은 고라니가 놀고 청솔모가 뛰어다니는 길이다.
▲ 봉통가는 길 이 길은 고라니가 놀고 청솔모가 뛰어다니는 길이다.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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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분 남짓 걸리는 봉통 가는 길이 좋다. 트럭이 있어도 나는 걷는다. 좁은 비탈길은 급경사를 이룬 산등성이를 돌아 봉통까지 이어진다. 길을 가다 보면 길 아래 풍경이 그만이다.

초입의 급경사를 오르면 나발도와 화태도의 월전리가 발 아래로 보인다. 선창 주변의 가두리 양식장의 파수꾼인 흰둥이가 지나는 배를 보고 짖어대고 독정 앞 등대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초입의 급경사를 한참 오르던 참이다.

"선생님!"

아이들이 부른다. 돌아보니 시온이와 나영이다. 선창에서 녀석들은 트럭 운전석 뒤편 좌석에 앉아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가방이나 차에 두고 올 일이지 가방을 메고 도시락 통까지 손에 들고 뛰어온다.

"왜, 차 안 타고?"
"선생님이랑 같이 갈라구요."

시온이와 나영이는 초등학교 1학년 동급생이다. 얼마 전 녀석들이 숫자 세기를 배우던 때, 발걸음을 백까지 세며 걷던 적이 있었다. 발걸음 세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나영이가 먼저 했다. 시온이 차례다. 자신 있게 시작은 했는데 열다섯 다음에 열일곱이다. 스물에서도 서른에서도 다섯 다음은 일곱이다. 시온이는 다섯 다음은 여섯이지만 꼭 두 자리 숫자로 가면 다섯 다음에 일곱이다. 한 번 각인된 순서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나영이가 나 몰래 가르쳐주고 내가 힌트를 주면서 간신히 백을 채웠다.

"선생님, 오늘 한 개 틀리고 다 맞았어요."

숫자 세기에서 풀이 죽었던 시온이가 오늘 본 수학 시험을 자랑한다. 아이들 재잘거림은 끝이 없다. 나영이도 뒤질세라 열심히 자랑한다. 내가 할 일이 없다. 그냥 귀 쫑긋거리며 맞장구치는 수밖에…….

"선생님 손이 따뜻해요."

나영이가 힘들었는지 내 손을 잡는다. 손이 차갑다. 시온이도 남은 한 손을 잡는다. 흔히 아이들 손을 고사리 손이라고 한다. 아침 이슬이 떨어지기 전 가느다란 햇살에 약하디 약하게 올라오는 고사리의 모양이 어린 아이의 손과 닮아서 붙여진 말일 게다. 꼭 쥐면 녹아버릴 듯한 솜사탕 같은 촉감이 너무도 좋다. 고즈넉한 산길을 맑은 영혼을 간직한 아이들 손을 잡고 걷는다. 동화 속 그림 같은 행복이다.

길 가운데 검은 비닐봉지가 보인다. 호기심 많은 시온이가 주웠다. 봉지 속에는 말랑말랑한 인절미가 일곱 개 들었다. 밖에 떨어진 것까지 여덟 개인데 땅에 떨어진 것은 시온이가 발로 차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도시 같으면 고민할 여지없는 일이지만…….

내가 먼저 맛을 봤다. 말랑말랑한 것이 맛이 좋다. 아마 트럭을 타고 먼저 갔던 사람들이 걸어오는 우리들을 위해 내려놓은 듯하다. 함께 먹기로 했다. 나눠 먹는 일은 시온이가 주웠으니 시온이 담당이다. 문제가 생겼다. 떡은 모두 일곱 개다. 우선 모두 하나씩 먹었다. 이제 네 개 남았다.

"모두 두 개씩 먹으면 되겠다."
"그럼 하나 남는데?"
"우리는 작고 선생님은 크니까 선생님이 먹어야 돼요."

시온이의 셈법이다. 나영이도 옆에서 생각이 같다. 나는 어른이니 어린이가 먹어야 된다고 해도 한사코 선생님이 먹어야 한단다. 아이들은 진지하고 단호하다. 시온이가 주는 떡을 받았다.

"나누어 먹자."

작은 떡을 나누어 시온이에게 먼저 주었다. 받지 않는다. 나영이도 손사래를 쳐가며 웃는다. 아옹다옹 작은 떡을 가지고 두 아이들과 행복한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 입에 넣었다. 눈물겹다.

봉통 마을 입구에서 서산으로 지는 해넘이를 함께 보았다. 카메라에 찍힌 해넘이 사진을 보면서 아이들이 합창을 한다.

"우와!"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도, 흔들린 사진도 모두 감탄의 대상이다. 아이들은 한동안 카메라 모니터를 보면서 '우와!'를 외쳤다.

시온이 집에 갔다. 녀석은 숫자가 가득 적힌 셈하기 문제집을 가져왔다. 빨간 동그라미가 가득한 쪽만을 펴 보인다. 아직 남은 쪽을 펴고 답을 적는다.

"10+7=17, 10+9=19"

답을 쓰던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머뭇거린다.

"10+10="
"10이 두 개면 얼마지?"

싱긋 웃으며 20이라고 쓴다. 녀석은 아직도 1 더하기 2는 12라고 대답하곤 한다. 손가락을 펴서 보여주어도 12라고 한다.

“봐, 1하고 2가 함께 있으니 12잖아.”

저녁을 먹으며 한참을 설명하고서야 시온이는 3이라는 숫자를 얘기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말하는 시온이. 쌩쌩거리며 언덕을 오르는 트럭을 마다하고 빠진 앞니를 내보이며 천진하게 웃으며 뛰어오는 나영이. 나는 봉통 가는 길에서 천사들과 손잡고 걸었다.

아이들과 함께 본 해넘이. 아이들은 카메라 모니터의 그림을 보고 '우와!'를 외치며 신기해 했다.
▲ 해넘이 아이들과 함께 본 해넘이. 아이들은 카메라 모니터의 그림을 보고 '우와!'를 외치며 신기해 했다.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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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와 나영이는 이 학교 1학년에 재학생이다.
▲ 화태초등학교 두라분교장 시온이와 나영이는 이 학교 1학년에 재학생이다.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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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섬마을 아이들, #아이들의 셈법, #봉통가는 길, #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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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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