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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출판의 진실
- 글쓴이 : 스탠리 언윈
- 옮긴이 : 한영탁
- 펴낸곳 : 보성사(1984.6.25.)


쏟아지는 책은 많으나 마음을 울리는 책은 나날이 줄어드는구나 싶은 요즘입니다. 돈벌이가 잘 되는 책을 내는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돈이 아닌 책으로 우리한테 즐거움을 선사하는 보람을 느끼려는 출판사가 차츰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책뿐이겠습니까?

 

올곧게 자기 마음을 이어가려는 사람이 줄어드는 모습은 책밭만이 아닌 우리 사회 구석구석 이곳저곳에서 느끼고 만날 수 있어요. 사람다움이 사라지고 반가움도 줄어들며 기쁨과 고마움이 사그라듭니다.

 

크고 빠르고 높고 멋지고 보기 좋고 하는 온갖 겉치레에 밀린 우리 마음과 생각과 뜻은 낡은 것이 되어 간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책이란 참말 무엇일까요? 책 내는 일은 또 무엇일까요?

 

제정신을 잃고 돈바라기가 되고 이름바라기가 되고 힘바라기가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입니다. 대학교가 학문을 갈고 닦으며 우리 삶과 삶터를 북돋우고 가꾸는 터전에서 멀어지며 권력 따위를 쉽게 손에 얻는 학벌증서 따는 곳으로 빛바랜 지 오래입니다.

 

비싼 등록금만큼 학생들한테 소중한 가르침을 나누고 있을까요? 쏟아지는 책을 보노라면 우리 책 문화도 이만큼 발돋움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할 텐데, 지금 형편을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요?

 

책은 무엇입니까? 책을 내는 속뜻이나 참뜻은 무엇이지요? 책으로 무엇을 나눌 수 있나요? 책으로 느끼거나 책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성경을 안 읽어도 좋은데, 성경을 안 읽고 목사가 될 수는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출판의 진실>을 읽지 않고 책마을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 책마을 사람들은 <출판의 진실> 같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아도 제 주머닛돈을 털어서 기꺼이 산 다음에 읽을 줄도 모릅니다.

 

(20) 잡지 <녹색평론> 11호
- 펴낸곳 : 녹색평론사(1993.7∼8.)


… 안정된 사회에서는 가족 중 누구라도 각기 역할이 있다 … <134쪽>


제가 사는 동네에는 구멍가게가 곳곳에 있습니다. 이제는 꾸려나가지 않으나 예전에는 구멍가게였음을 알려주는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제법 됩니다. 인천 안쪽 동네인 동인천 쪽은 백화점이나 큰 할인매장이 크게 힘을 쓰는 곳이 아닌 터라 구멍가게 살림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값싸게 물건을 사는 곳으로 간다지만, 걸어서 갈 만큼 가깝거나 차를 움직여 가기 좋은 곳이 아니면 애써 먼 길을 가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물건을 사든 똑같은 물건이니까요. 값만 조금 다를 뿐이니까요.

 

큰 할인매장에 가 보면, 덩어리로 묶어서 싸게 파는 물건이 많이 보입니다. 얼핏 넘겨다 보아도 참 싸구나 싶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습니다. 과자부스러기에 손을 대고 싶지 않고, 쓰고 나면 쓰레기가 많이 남는 물건이기에 손이 가지 않아요. 값이 싸서 더 많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저는 ‘더 많이’보다는 ‘그때그때 쓸 만큼’만 장만하고 싶습니다.

 

조그마한 김치냉장고 하나 쓰는데, 물을 시원하게 마신다며 서너 통 넣으면 꽉 찹니다. 먹을거리를 잔뜩 사서 쟁여 놓고 먹을 수 없습니다. 겨울에는 돼지코도 뽑을 생각입니다. 옷장은 따로 없이 두 칸짜리 다용도장에 바지와 윗도리를 나누어 놓고 쌓인 차례대로 입습니다. 은행계좌에도 돈이 거의 없지만 지갑에도 돈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저절로 씀씀이를 아낄 수 있고, 씀씀이를 아끼는 만큼 벌이가 많지 않아도 살림을 꾸릴 수 있습니다. 적은 벌이(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 벌이)지만, 더 많이 벌려고 품과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제 자신을 다스리거나 제 마음이 가닿는 일과 놀이를 한껏 즐길 수 있습니다.

 

(21) 삼성인의 상식 200
- 펴낸곳 : 삼성인력관리위원회(1992.11.25.)


세상에는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묻어 두다가 무덤에까지 안고 가는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덤까지 안고 간 이야기들이 어느 날 무덤이 파헤쳐지면서 세상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죽은 사람과 함께 ‘죽어 버리지 못한 책과 자료’는 남은 사람들한테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내한’이라는 꼬리말이 붙은 <삼성인의 상식 200>은 비매품으로 찍어서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만 돌린 책입니다. 이런 책이 나왔음은 신문이고 잡지고 방송이고 알려지지 않았고, 오로지 삼성에 들어간 사람한테만 주어지고 돌려졌습니다. 바깥으로 나돌 까닭이 없고, 바깥으로 나돈다고 하여 눈여겨 살피거나 읽을 사람이 없습니다.


 ┌ 담배 한 대 피우는 데 사용되는 회사 돈은 900원입니다.
 └ 커피 한 잔 마시는 데 사용되는 회사 돈은 1800원입니다.


하지만, ‘삼성’이라는 회사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어떤 짜임새로 굴러가고 있는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이야기가 묻혀 있는지 궁금한 사람한테는 꼭 손에 쥐고픈 책이 될 수 있겠지요. 삼성이라는 회사가 이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을 분들한테는 하나도 재미없을 뿐 아니라, 귀찮아서 그냥 폐휴지로 버리고 말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겠지요.


…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슈퍼마켓에 가서 치약 한 개를 고르더라도 색깔별, 성분별, 가격별로 수십 가지가 있어 고르는 데 골치가 아픈 반면, 소련이나 북한에서는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는 대로 받아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하에서만 가능한 이유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자기가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단순한 착각에 머물지 않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책임과 권한을 주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일종의 착각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영의 극치이며, 종업원은 물론 협력업체들에도 이와 같은 건설적인 착각 현상을 유발시킬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오늘날의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인 것이다 … (104∼105쪽)


<삼성인의 상식 200>을 보면, 노동자 이야기가 없습니다. 노동조합 이야기도 없습니다. ‘상식’이 아니기 때문일 테지요.

덧붙이는 글 | 판이 끊어지거나 시중에 나돌지 않는 책이지만, 우리 삶과 삶터를 돌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책 세 가지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출판의 진실 - 출판편집총서 2

스탠리 언윈, 보성사(1984)


태그:#절판, #헌책방, #스탠리 언윈, #녹색평론,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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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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