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변변한 문화재 하나 없습니다. 수려한 자연 경관을 뽐내는 산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귀를 솔깃하게 하는 설화나 전설이 담겨져 있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 또한 아닙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세월의 더께 가득한 옛것보다도 화사하고 정갈한 새것이 더 많아 전혀 낯설지 않고, 우리나라의 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것은 적은 대신 여느 곳에서는 보기 힘든 볼거리가 많아 독특한 멋이 있습니다.
도심 속 공원이나 대저택의 정원처럼 잘 가꿔진 조경도 그렇거니와 절 안 곳곳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범종교적’인 분위기는 이곳의 자랑거리입니다. 입구의 비탈진 공간에 세워진 ‘티베트 불교박물관’은 덤이자, 지금에 와서는 이 절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절을 찾아 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도로변에 빼곡하게 심어진 십리 길 벚나무는 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야무지게 섰고, 산사를 찾는 이들의 정갈한 마음을 어지럽히는 음식점이나 카페는 거의 없습니다. 가로수를 벗 삼아 무심하게 산을 오르면 그 막다른 그곳에 요새처럼 절이 자리합니다.
늘 푸르고 잔잔한 주암호를 끼고 있는데다 광주광역시가 지척인 까닭에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많습니다. 특히 벚꽃이 피는 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자동차로 몸살을 앓으며 톡톡히 ‘유명세’를 치르지만, 이 절이 지닌 참 멋을 느끼고 싶다면 땅에 낙엽이 뒹굴며 서걱거리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어른 키 남짓한 조그만 일주문과 그 곁에 빙긋 웃으며 반기는 아기 돌부처를 지나야 비로소 절 안입니다. 앙증맞은 일주문도 그렇지만 돌부처의 머리마다 씌워진 빨간 ‘모자’는 즐거운 파격입니다.
머리에 쓰고는 있지만, 그것은 모자라기보다는 코바늘로 짠 동그란 ‘아크릴 수세미’입니다.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릇이 잘 닦여 최근 각 가정마다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는 ‘친환경’ 생활용품 말입니다.
나날이 추워지는 계절인지라 부처님 따뜻하라고 씌운 것일 테지만, 친환경 소재가 지닌 이미지에다 색깔마저 화사해 작고 밋밋한 불상을 생동감 있는 볼거리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이곳 스님들의 탁월한 미감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풍경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나무 그늘 아래 넓고 평평한 돌 탁자를 놓고 긴 벤치 네 개를 둘렀는데, 이름 하여 ‘야단법석(野壇法席)’입니다. 본디 이것은 ‘법당 바깥에 자리를 깔아두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의미이지만,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나 법력 높은 고승이 중생들을 앉혀놓고 설법을 베풀기에는 너무 비좁고, 그렇다고 장삼이사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이기에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저 무더운 여름에 차분히 앉아 더위를 식히거나, 늦가을 이맘때쯤 기대어 앉아 낙엽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책 한 권 읽을 만한 그런 곳입니다. 그러하니 굳이 의미로만 본다면 어색하지만 ‘애칭’ 삼아 부르기에는 정감어린 이름입니다.
화장실 주변에 가꿔놓은 소담한 차밭과 연지(蓮池)도 재미있는 풍경 중 하나입니다. 절 안의 너른 공간을 다 비워두고 왜 하필이면 화장실 옆에다 만들어 놓았을까 궁금할 따름입니다. 화장실이 지닌 ‘불결한’ 이미지를 해소하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화장실의 우리 몸-곧, 인분(人糞)-도, 이슬 머금은 찻잎도, 탐스러운 연꽃도 본디 다 같은 것이라고 본 것은 아닐는지. 불결한 마음과 눈을 통해서 보니 그러할 뿐, 그저 우리 삶 속에서 인연이 돼 만나는 ‘것’들로 무덤덤하게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수 해 전 티베트를 여행하다가 야크의 둥글고 딱딱한 배설물이 티베트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야크의 배설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만지는 그들에게 불결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삶 자체를 모독하는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화장실을 나오며 더러워졌다며 물로 손을 씻어낼 일이 아니라, 마음과 눈에 끼어 있는 해묵은 편견의 때를 벗겨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화장실 주변을 서성거리며 깨닫게 된 (교훈이라면) 교훈입니다.
‘늦가을’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를 돌아, 흡사 위세 있는 어느 반가의 별서(別墅) 정원 같은 연못을 건너면 법당이 있는 안마당에 이릅니다. 고운 잔디가 깔린 안마당 둘레로 기와를 얹은 야트막한 담이 둘러쳐져 있어, 고을의 젊은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향교나 서원 같기도 합니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담벼락 너머로 다 들여다보이는 요사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입니다. 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입구에 엎드려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누렁이 한 마리가 이곳이 관광객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경건한 예불 공간인 법당(극락전) 바로 곁에 요사채를 둔 탓이라지만, 컹컹 짖는 개를 ‘불경하게도’ 법당 옆에 묶어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 짓게 만듭니다. 법당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한 부도 한 기와 창건자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을 모신 영각(影閣)이 있고, 그곳에서부터 이 절의 백미인 ‘산책로’가 시작됩니다.
짙푸른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숲에 부딪는 바람 소리가 죽비소리마냥 괄괄합니다. 발 아래 낙엽 부서지는 소리와 섞이면서 차분한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 담깁니다. 손에 책 한 권 들고 바쁠 것 없이 천천히 걷고 싶은 그런 길입니다. 더욱이 길과 나란하게 수줍은 듯 실오라기마냥 물 흐르는 계곡이 있어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걷다 보면 책이 필요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주옥같은 성찰의 메시지가 담긴 팻말이 여유로운 걸음걸이에 맞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뭇가지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두 문장의 짧은 글귀일 뿐이지만, 여운은 머릿속에 깊이 각인돼 그 자리를 허투루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절이되 불경 구절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성서 구절도 있고, 힌두교 경전에서 따온 것도 있으며, 중국 속담이나 큰 스님들의 어록에서 발췌한 것도 있습니다. 출처는 달라도 하나 같이 ‘참 삶’과 ‘참 행복’을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책에 밑줄 긋듯, 음미하며 읽어 가노라면 현재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잔잔한 깨우침을 통해 새로운 다짐을 갖게 만듭니다. 절 울타리마냥 감싸 도는 그 길을 걷다보면 좋은 책 한 권을 골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갔던 길 다시 밟지 않고, 큰 포물선을 그리듯 거닌 산책이 끝나는 곳은 다시 ‘야단법석’입니다. 호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어 걸으며 보았던 낯선 풍경과 걸으며 읽었던 글귀를 생각나는 대로 적기 좋은 ‘명당자리’입니다. 이제 보니 그러라고 굳이 이곳에 ‘자리를 깔아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이 코앞인 이즈음 누구는 마지막의 애틋함을 보려 ‘늦단풍’ 여행을 떠난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낭만이 넘실대는 이른 겨울바다로의 여행을 꿈꾸며, 또 다른 이들은 연중 이맘때에만 볼 수 있다는 철새들의 군무를 보기 위해 쌍안경을 챙겨 갯벌을 애써 찾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즈넉한 산사를 산책하면서 달력에 고작 종이 한 장 남은 한 해를 차분하게 정리하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 성찰과 다짐을 화두 삼아 한나절을 함께 해 봄이 어떨지. 늦가을을 닮은 이곳은 바로 남도 땅 보성군 문덕면에 자리한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일주문 못 미쳐 주차장과 나란한 자리에 '우리나라 안의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 박물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달라이 라마 기념상과 강연, 영상물 등 티베트 불교 자료와 탕카(티베트 회화), 희귀 불경과 밀교 법구 등 뛰어난 예술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한편, 지하에는 조장(티베트 장례) 사진 등이 걸려있는데 여느 곳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