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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대둔산을 찾아 떠났다.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으면서도 다시 찾기까지 스무 해가 지나버렸다.


20대의 정열은 사라지고 이제 11월의 날씨처럼 기우러 지고 있는 나이. 그때 함께 산을 찾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연락을 하고 있지만 나머진 소식조차 모른다. 어쩌면 그때 우리가 떠났던 나이의 자식을 두고 있는 친구도 있을지 모른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한가했다. 눈앞에 대둔산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슬며시 속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수줍게 웃던 친구였다. 산을 오르며 손을 잡아주고 이끌고 했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을 그 친구나 나나 말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대둔산은 오솔길 같은 길이 거의 없다. 순전한 바위길이다. 이따금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나오면 그때야 한숨 돌리고 주변 산세를 구경할 수 있다.

 

 

가파르게 산을 오르다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중년 여인 세 사람이 "힘드네요" 하며 앞질러 간다. 다시 그 친구가 떠오른다. 아마 그 친구가 옆에 있다면 물병을 건네주며 ‘마셔!’ 할 것 같다.

 

우리가 오르는 코스는 신선암에서 칠성봉 방향이다. 칠성봉 전망대와 낙조대에 올라 산세를 한눈에 보기까진 대둔산의 아름다운 비경을 볼 수가 없다. 칠성봉을 떠나 장군바위와 왕관바위에 올랐다. 다시 왕관바위에서 단풍과 바위들의 아름다움에 취할 겨를도 없이 마천대에 올랐다.

 

 

마천대는 봉우리가 하늘과 맞닿았다는 의미로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날이 맑은 날엔 진안 마이산과 멀리는 지리산 천왕봉, 그리고 변산반도의 서해바다까지 눈에 들어온다고 하지만 바다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천대 정상에서의 조망은 아름다웠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칠고 힘들었던 숨도 가라앉았다. 정상이란 이런 것일까.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곳, 거친 숨도 가라앉히는 곳, 잠시 동안이나마 세상의 것을 잊게 만드는 곳, 이런 곳이 마지막 오름에 오른 기분일까.


붉은 빛깔 속에 은빛의 기암괴석들이 허공에 떠서 빛나고 있었다.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에 비견할 만한 기암단애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긴 시간을 두고 기암들을 감상해도 시간가는 줄 모를 것 같다.

 

 

내 이십 대에 올랐던 대둔산에 이 아름다운 바위들은 없었다. 아니 바위가 없었던 게 아니라 바위를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위를 향해 오를 열정만 가득했을 것이다. 좋은 마음 품고 있던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싶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세월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비경을 드러내고 있는 산의 모습이 기억에 없는지 몰랐다.


마천대를 내려와 금강 구름다리에 올랐다. 구름다린 내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유일한 존재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난 구름다리를 보고 질색을 했었다. 구름다리 앞에서 망설이는 날 보고 그녀는 말했다. "왜 안 가?" 하고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무섭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구름다리를 건넜고 가운데서 용감한 척 사진도 찍었다. 언젠가 앨범을 펼쳐보며 그때의 사진을 보곤 실없이 미소를 지었었다.

 

 

구름다린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이 드신 할머니들도 있었다. 대부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사람들이다. 한 노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보호하듯 걸어간다. 젊었을 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호했을 것이다. 이젠 기운 빠진 할아버지를 위해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부축하듯 걸어간다. 그 모습이 산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빛나 보인다. 허면 이건 산의 위력일까 아니면 두 노부부의 위력일까?


구름다리를 지나오면 주차장까진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가뭄 탓인지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는 없다. 팍팍한 다리쉼을 할 때쯤 붉게 타는 단풍나무가 떠나는 길손을 배웅한다. 그러고 보면 이 단풍나무는 산을 오르는 자들에겐 즐거운 상상의 기쁨에 젖어들게 하고 산을 떠나는 길손에겐 가을 산의 정취를 듬뿍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태그:#대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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