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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이 만발한 지난 4월의 풍경 사과나무를 분양받고 처음 찾아왔을때의 풍경이다. 사과꽃을 보러왔는데, 궂은 날씨덕에 때가 좀 일렀다.
배꽃이 만발한 지난 4월의 풍경사과나무를 분양받고 처음 찾아왔을때의 풍경이다. 사과꽃을 보러왔는데, 궂은 날씨덕에 때가 좀 일렀다. ⓒ 문일식

지난 2월 충북 보은 산외면에 위치한 사과농원에서 사과나무를 하나 분양받았다. 법주사까지 10분도 채 안 걸리는 그야말로 보은의 구석이자 사람의 발길이 뜸한 청정한 곳이었기에 다른 어떤 곳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했던 스피노자의 철학적 심오함을 위해서도 아니고, 30kg 수확보증 때문도 아니었다.

사과농원에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충북 보은의 한 사과농원의 풍경
사과농원에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충북 보은의 한 사과농원의 풍경 ⓒ 문일식

사과나무에서 잎새를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비록 1년간이지만, 사과나무에 내 이름이 붙는다는 것과, 비록 1년 동안 돌보지는 못하지만 사과나무에 대한 애정을 뿌려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더하여 보은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여행할 심산으로 분양받은 사과나무였다.

분양을 받고, 수확을 앞둔 시점까지 불행히도 한 번밖에 찾아가지 못했다.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씩은 오고자 했던 다짐을 돌아보면 괜히 쓸데없는 짓 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때마침 평일에 쉴 기회가 있어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여행길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옥산IC에서 내려 조치원에서 청주로 이어지는 플라타너스 길을 지났다. 큰 잎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낙엽들이 영낙없는 가을의 풍경이다.  청주 외곽을 돌아 보은으로 향하는 주변 산세도 알록달록 이쁘게 물들고 있는 중이다. 때마침 어울리는 가을풍경과 수확의 기쁨까지 맛볼 생각하니 가속 페달이 절로 밟아졌다.

분양받은 수확전의 사과나무 내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사과나무가 무척 풍요로워 보인다
분양받은 수확전의 사과나무내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사과나무가 무척 풍요로워 보인다 ⓒ 문일식

쉬엄쉬엄 도착한 산외면 파란농원. 이곳은 벌써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사과나무밭은 한창 수확을 기다리는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은 기운이 가득하고, 이에 질세라 주변 산세의 단풍도 울긋불긋하니 이쁘기 그지없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주인 아주머니를 따라 내 이름이 걸린 사과나무로 향했다. "정말 오랫만이다. 그리고 미안하다" 가지가 처지도록 매달린 사과나무들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주인이었을 게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사과... 별것아닌 것 같으면서 꽤 의미가 있는 사과가 되버리는 문자사과
행복이라는 이름의 사과...별것아닌 것 같으면서 꽤 의미가 있는 사과가 되버리는 문자사과 ⓒ 문일식

맛있게 생긴 녀석 하나 따서 맛 한 번 보란다. 잘 익은 녀석을 하나 골라 입에 한가득 베어 물었다. 과즙도 풍부하고, 새콤달콤한게 맛이 참 좋다. 막 딴 사과는 약 5~6일 정도 숙성시켜야 제맛이 난다고 한다. 사과따는 법을 잠시 배우고, 사과를 따기 시작했다. 큰 녀석들은 두 주먹을 합친 것보다도 커서 내심 나를 놀라게 했다. 올해 태풍이 많이 올라왔었는데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사과의 품종도 여러가지 하는데 대부분 소비자와 직거래를 한단다.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라며 미소가 가득 하시다. 왠지 부럽다.

나의 닉네임으로 문자사과를 만들었다. 당신을 위한 행복이라는 닉네임이 새겨진 사과
나의 닉네임으로 문자사과를 만들었다.당신을 위한 행복이라는 닉네임이 새겨진 사과 ⓒ 문일식

얼마 전에 문자사과도 만들었다(물론 전화상으로 부탁한 것이다). 수확 전 사과를 골라 테이프에 글씨를 써서 붙이면 검은색 글씨가 써진 부분은 빛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곳만 노랗게 변한다. 내가 좋아하는 닉네임으로 부탁했다. Happy4U…. '당신을 위한 행복'이란 뜻이다. 사실 사과나무를 분양받으면서 이런 생각도 했었다.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수확할 때 쯤 같이 찾아와 사과나무 아래서 Happy4U가 적힌 사과를 따주며 당신을 위한 행복이 되겠노라고 프러포즈를 하는 그런 생각…. 우습게도 그저 어렴풋이 스쳐지나간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무게를 재보고 있는 사과들... 사과나무밭에서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와 잠시 무게를 재보았다.
무게를 재보고 있는 사과들...사과나무밭에서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와 잠시 무게를 재보았다. ⓒ 문일식

사다리를 타고 올라 높은 곳에 있는 녀석들도 땄다. 내 손이 닿자마자 '똑'하고 부러지며 큼직하고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손에 들려진다. 큰 바구니로 벌써 3개째를 채우고 있었다. 풍성한 느낌이 가슴에 가득했다. 농부들이 느끼는 수확의 기쁨이 과연 이럴까? 애정어린 손길 한 번 주지못한 나도 이럴진데, 매일매일 나무를 어루만지며 애지중지한 주인 내외분들은 얼마나 뿌듯할까? 두 손에 사과가 가득 들은 바구니를 들고 내려오는데도 무거움을 좀체 느낄 수 없었다.

사과박스에 넣고 있는 수확한 사과들... 부모님께 보내지는 사과...문득 가슴이 뿌듯해진다.
사과박스에 넣고 있는 수확한 사과들...부모님께 보내지는 사과...문득 가슴이 뿌듯해진다. ⓒ 문일식

막상 따가지고 내려오니 역시 생각나는 것은 가족뿐이다. 큼직하고 잘 익은 녀석들을 골라 부모님께 한 상자, 동생 내외한테 한 상자 만들어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내가 가져가기로 했다. 주인 내외분이 이번에 수확한 거라며 배와 미니사과도 박스에 담아주신다. 풍성한 수확만큼이나 넉넉한 인심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벌써 어디로 갈 녀석들인지 대충 정해져 있다. 회사 동료들, 모임사람들에게 맛을 좀 보일 생각이다. 사과박스에 담아 차 안에 실어놓으니 제법 묵직하다.

사과농원에서 만든 방갈로... 맑은 물과 높은 산이 듬직한 이곳, 여름에 오면 특히 좋을 것 같다.
사과농원에서 만든 방갈로...맑은 물과 높은 산이 듬직한 이곳, 여름에 오면 특히 좋을 것 같다. ⓒ 문일식

올해는 회사가 어수선하다보니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년에도 좋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내년에는 두 그루를 분양받아볼까 생각중이다. 올해 생각했던 것, 내년에는 다시 해볼 생각이다. 부모님도 한 번 모셔와야겠고, 친구들과도 한 번 와야겠다. '언덕위의 다락방'에서 고기구워 소주 한잔도 좋고, 속리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줄기 속에서 고기도 잡고, 멱도 감아야겠다. 아, 그래… 내년에는 정말 여자친구 생기면 사과나무 아래서 멋진 프러포즈도 꼭 해야겠다.

사과농원의 주변 풍경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사과밭은 사과로 붉게 물들어있다.
사과농원의 주변 풍경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사과밭은 사과로 붉게 물들어있다. ⓒ 문일식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내려오다보니 어느새 사과농원을 벗어나고 있었다. 농원 옆 갈색빛 곱게 차려입은 나무를 지나고, 가을빛 경쟁이 치열한 사과나무밭과 뒷산의 단풍이 조금씩 색을 더하고 있다. 보은에서 느끼는 가을의 오후는 아쉽게도 짧다. 풍성함을 느끼는것도 잠시 겹겹이 둘러쳐진 산세사이로 서서히 햇빛이 잦아든다.

사과농원을 떠나는 길 가을빛으로 물든 커다란 나무가 한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과농원을 떠나는 길가을빛으로 물든 커다란 나무가 한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 문일식


#충북#보은#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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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글과 사진을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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