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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벽소령 산장 마당의 우체통.
 지리산 벽소령 산장 마당의 우체통.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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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 이틀에 걸쳐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을 탔다. 하룻밤을 벽소령 산장에서 잤다.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니, 시간이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린 것이다. 산장이 문을 열 때까지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문득 빨간 우체통 하나가 내 시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한순간, 아주 작은 감동이 가슴 한 켠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써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은 오래도록 행복감에 젖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편지를 쓰지 않은 지 오래 됐지만, 한때는 나도 누구 못지않게 편지를 썼던 사람이다. 군대 생활 3년 동안엔 하루에 많게는 60통에서 적게는 20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양초등학교 6학년 한 반 전체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

그 때문에 두 번째 휴가 때는 남양초등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담임선생 대신 2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다. 특히 부산의 은영이라는 초등학교 3학년 꼬마와는 무려 6년간이나 편지를 주고받았다. 가수 윤항기는 장밋빛 스카프만 보면 걸음이 멈춰진다고 하지만 난 빨간 우체통만 보면 저절로 걸음이 멈춰질 정도다.

군대 시절 펜팔의 기억을 떠올리다

군대 생활 중 가장 막막할 때가 첫 휴가를 끝내고 귀대했을 때이다. 아직도 내게 부하된 세월은 2년이란 하중을 요구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의 코드는 단지 막막함으로 읽힐 뿐이었다.

군대 생활이란 서서히 진행되는 치매 현상의 일종이다. 잎싹에 싹이 나서 잎싹이 감자 감자할 때까지 소통 부재의 세월이 부단히 흘러간다. 이미 골수 깊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치매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외부를 향해 끝없는 S.O.S 신호를 보내야 했다. 아마도 그 시절 나에게 편지란 쓰고 또 써도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일종의 시장기였을 것이다.

친구들은 물론 친구의 동생, 친구의 어머니에게도 안부를 묻는 글발을 띄웠다. 줄잡아 하루 20여통 이상은 되었으리라. 그만큼의 편지가 답장이라는 형식으로 내 마음 속의 공복으로 답지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네 생이 언제 한번 뿌린 만큼 거두고 투자한 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정직성을 보여 준 적이 있던가. 군대 갔다 온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자기가 띄운 편지 양만큼 답장이 되돌아오는 법은 없다. 그에 따라 군발이의 비애도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간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신발공장들은 말표고무신이나 다이아표 통고무신이거나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이 근무했던 군산의 만월표 경성고무나 할 것 없이 애인을 군대 보내고 난 후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신발을 바꿔 신는 처녀들의 불건전한 소비 행태에 의해 번영을 누려왔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금욕주의의 스토아학파의 일원이었던 나는 남들처럼 애인이란 '애물단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조국의 경제 발전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제대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속죄하고 또 속죄할 따름이다.

나는 군대의 보직이 특수했다. 그래서 일반병들과는 격리되어 홀로 지내야 했다. 또 보초나 불침번까지 면제되어 일주일에 그저 한두 시간만 일하면 땡이었다. 가히 '귀족 사병'이라 할만 했다. 내 사무실은 장교든 장군이든 허가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치외법권' 지대이기도 했다. 모든 검사나 검열로부터도 안전을 절대보장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고참들은 파주 감악산에서 따온 머루나 다래로 담은 술이며 주민 몰래 캐다 담은 인삼주며 뱀술, 보리수 술 따위를 담은 술병들을 들고 와 고이고이 보관해 주길 원했다. 나의 사무실은 거대한 '주류창고'였다. 나는 가끔 하릴없이 심심한 시간이면 이 술병들을 돌아가면서 마셔 버렸다. 술병이 비워지면, PX에서 맨 소주를 사다 부으면 그만이었다.

어떨 땐 서너 탕씩이나 우려내어 마셔버리는 바람에 숫제 다래나 머루 인삼 등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맨 소주에 지나지 않게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용케 단 한 번도 들킨 적은 없다. 왜냐하면 고참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후에 입가심을 위해서 맡겨둔 귀한 술들을 가지러 오는데, 그때는 이미 물인지 술인지조차 분간 못 하는 주맹(酒盲)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님하, 당최 그 맨 소주 마시지 마소. 그예 임이 마셔버리시네. 기어이 임이 마셔버리니 이 일을 어찌할꼬. 위 증즐가 태평연월.

나는 그 태평성대가 주는 지복위에서 일종의 '벤처 마케팅'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편지대필 사업이었다. 어떻게 해서 소문이 번졌던지, 고참들은 가끔 졸병을 닦달해서 얻은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와서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아무리 간절하게 부탁할지라도 일단은 거절한다. 3~4번 거푸 부탁하면 그때야 못 이기는 체 하고 대신 편지를 써줬다.

기왕에 써줄 걸 왜 화끈하게 써줄 일이지 왜 그랬느냐고? 각골난망이란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뼈에 새겨도 인간의 배은망덕은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대개는 3-4통 정도 써주면 약발이 나타났다. 아가씨가 면회를 오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나의 주류창고에 술과 사제담배 한 보루가 수납되는 날이다. 술과 담배가 면회 당일에 수납되는 기적은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고참은 외박 펜팔을 주고받은 처녀와 외박 중이었기 때문이다.

재주는 노동자가 부리고 과실은 사용자가 먹는 현실이 군대에서도 똑같이 연출되는 셈이다. 그런 날은 거북선이나 은하수 등 사제담배 맛이 화랑 담배보다 오히려 썼다. 참으로 개 같은 경우였다. 어쨌거나 나의 신종 벤처는 나날이 번창을 거듭했다. 거기에 비례해서 내가 하루에 쓰는 편지량도 그만큼 늘어만 갔고. 그러나 주류와 담배가 쌓여가도 내 마음 속 공허는 다리 밟힌 강아지처럼 낑낑대고 있었다.

어느 날 이슥한 밤에 인사과 고참인 강생훈 상병이 편지 몇 묶음과 소주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심심하면 이 많은 위문 편지 중에 네가 골라서 한 번 답장을 써보라는 것이다. 이 전남 여수 출신의 강생훈 상병은 정말 콩 한쪽만 생겨도 날 불러 나눠 먹고 술 반 잔만 생겨도 나를 불러내어 나눠 마셨다. 그 점에선 대구 출신의 우리 중대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농사지어서 누구랑 누구랑 먹을까?" 이를테면 나는 군대생활 내내 두 사람의 우렁각시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이튿날 낮에 위문편지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다 그중에서 가장 잘 쓴 편지 한 통을 골랐다. 부산시 부전1동(서면 로타리던가!)에 사는 전은영이란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였다. 난 지체없이 모르스 부호를 두드렸다. 뚜뚜 뚜 뚜뚜뚜. 안녕,  이 꼬마야. 이  아저씨는 지금 난파중이란다.

직유의 삶에서 해체되지 않은 은유로 남은 추억


일주일쯤 지나자 답장이 왔다.  그리하여 은영이와 나는 일주일에 3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은영이는 정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깜찍한 문장력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허공은 은영이가 피우는 꽃으로 너울너울 화사해 갔다.

국방부 시계는 고장이 없다. 두 번째 휴가를 지나 은영이와 펜팔을 시작한 지 1년 반이나 됐을까. 4학년이 된 은영이는 제 사진에 언니 사진까지 덤으로 동봉하면서 내게 은밀하게 말했다. "아저씨, 저 예쁘죠? 우리 언니들(3명. 2명은 대학생) 참 미인이지요?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와요. 다들 기다리거든요."

그러면서 한편 은영이는 내 사진도 보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다. 마지못해 보낸 내 사진을 받아본 은영이는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 "아저씨, 생각보다 참 못 생겼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저씨도 나보고 못 생겼다고 놀릴 테니 취소할게요." 은영이가 내 삭막한 군대 생활의 허공에다 피워준 꽃이 만발할 즈음 난 군대를 제대했다.

은영이는 제대하면 꼭 부산 서면의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제대 한 달쯤 지나 은영이를 만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역 앞에서 은영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 저편에서 음성이 들려오고 난 순간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놨다. 그리고 태종대로 발길을 옮겼다. 태종대의 바람은 쉬 모든 걸 날려버린다. 그립다는 생각까지도, 오랫동안 쌓아온 갈망까지도 산산이 흩어가 버린다.

용두산에도 올라가서 비둘기들이 보여주는 오프라인 모임을 구경하기도 하고 광안리, 에덴공원, 을숙도 등지를 가뭇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2박 3일의 시간이 흐지부지 흘러갔다. 결코 은영이를 만나선 안 된다. 많은 날을 환멸에 떨어본 나는 은영이가 내게서 느낄 환멸이 두려웠다. 이 생각이 부산에 있는 내내 나를 지배했던 것이다. 끝내 나는 은영이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광주행 고속버스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러나 편지는 은영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기까지 이어졌으며 그 후 또 한 차례 은영이를 만나러 부산에 가지만, 먼저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 오게 된다. 은영이에게 부치는 편지에는 내가 저를 만나러 부산에 갔다가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늘 생의 변두리에서 삶의 허망함에 가슴 저리며 살던 내 쓸쓸한 젊은 날에 은영이는 예쁜 리본을 달아준 아이였다. 지금도 은영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6년 동안의 시간을 생각하면 난 어느덧 태종대 난간에 서서 대책 없이 펄럭이곤 한다.

가을 속엔 남성의 감성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최양숙이 2005년 7월에 다시 낸 앨범. '가을편지'는  첫 번째 트랙에 실려 있다.
 최양숙이 2005년 7월에 다시 낸 앨범. '가을편지'는 첫 번째 트랙에 실려 있다.
ⓒ 지구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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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다 '가을편지'라는 노래를 들었다. 최양숙이라는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였다. 김민기도 이 노래를 불렀지만. 난 그의 저음보다는 최양숙의 클래식한 창법을 더 좋아했다.

1970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고은 시인의 시에다 김민기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젠 세월이 흘러 세상사에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졌다.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도,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도 버린 지 벌써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 속에 숨겨진 현 하나가 팅,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듯한 느낌에 젖는다. 나도 모르게 한쪽 가슴이 알싸해진다. 어찌해서 난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가을을 타는 것인가. 어쩌면 가을이란 계절 속엔 남성의 숨겨진 누선을 자극하는 인자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 고은 시 '가을편지' 전문

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허무맹랑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편지를 하겠다는 것까지야 누가 말리랴. 그러나 문제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달라고 애원한다는 데 있다. 아무리 외롭다지만 밸도 쓸개도 없다더냐. 대상도 정하지 않은 채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정 편지를 보내려고 하는 시 속 화자의 행태가 몹시 불안하고 염려스럽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고까지 강변한다. 무슨 초칠 맛으로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을 보내려 하며, 무슨 근거로 낙엽이 사라진 마지막 날까지 헤매인 넋 나간 여자가 아름답다고 역성을 드는가.

시의 작자가 고은 시인이라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 시시하기 짝이 없는 시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이름값 때문인지 이후, '가을편지' 혹은  "가을 편지'라는 제목을 단 시를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내가 보기엔 하나같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맑은 영혼의 잉크 물로 쓴 가을 편지

200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성선 시인의 마지막 시들을 모아 2002년에 출간한 시집 <물방울 우주> 표지.
 200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성선 시인의 마지막 시들을 모아 2002년에 출간한 시집 <물방울 우주> 표지.
ⓒ 황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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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읽을만한 시 한 편을 고른다면, 2001년에 세상을 떠난 이성선 시인의 시 '가을편지' 를 꼽고 싶다.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이성선 시 '가을편지' 전문

이성선 시인은 1970년 <문화비평>에 '시인의 병풍' 외 4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74년 첫 시집 <시인의 병풍>을 펴낸 이래, 시인은 <하늘 문을 두드리며>(1977), <몸은 지상에 묶여도>(1979), <밧줄>(1982),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1985), <별이 비치는 지붕>(1987), <별까지 가면 된다>(1988), <새벽꽃 향기<(1989), <향기나는 밤>(1991),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2000)등의 시집을 차례로 세상에 내놓았다.

내가 보기에 이성선 시인은 출가한 스님처럼 살다간 분이다.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이라 불렀고, 머리를 깎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동해가 가까운 설악산 기슭에서 살면서 시를 썼던 그는 시의 소재로 나무, 해, 달, 별, 하늘 등을 즐겨 썼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것, 인간의 욕망을 던져버린 '초연물외(超然物外)'의 경지에서 대자연을 노래했다. 그의 시에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묻어난다. 시 '가을편지' 는 그가 세상을 등진 다음해에 나온 시집 <물방울 우주>에 실려 있는 시편들 가운데 하나다.

나는 본래 시든 산문이든 경어체 문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쓴이의 은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어체는 알게 모르게 문장이 가진 불완전함을 지탱해주는 버팀목 노릇을 한다. 이성선 시인의 시 '가을편지'에서도 경어체는 극도의 위력을 발휘한다. 공손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는 이 시가 지닌 본래의 서정성에다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다. 그러니 이런 '가을 편지'를 받으면 어느 누가 뿅 가지 않겠는가.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은 편지를 "당신"에게 직접 전하지도 않는다. 나무에게 전해달라며 중간자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고은 시인의 시 속 화자가 천방지축인데 반해 이성선 시인의 시 속 화자는 너무나 조심스럽다. 어제는 "사랑함으로 오히려/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내고, 오늘은 "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다.

내가 보기에 고은 시인의 시 속 화자나 이성선 시인의 시 속 화자나 둘 다 애시당초 연애하기엔 글러버린 사람들이다. 한쪽은 너무 설쳐서 상대가 질색하기 쉽고, 한쪽은 너무 신중해 상대가 짜증스러워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의 연애 방식 중에서 굳이 한 가지를 택하라면  난 이성선 시인의 시속 화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우리가 이미 무용지물이면서, 한편으론 그립기도 한 매우 고전적인 연애방식이기 때문이다.

6년간이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은영이는 이 단도직입적인 직유의 형식인 삶에서 유일하게 해체되지 않고 끝끝내 은유로 남은 아름다움이다. 생이 잔인할수록 추억은 불멸이다. 내게 세상은 낡은 것이 된 지 오래 되었다. 그리고 은영이도 이제는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아줌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은영이는 지금도 여전히 초등학생이며, 갓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이다.

나이 헛먹었다고, 소가지 하나 없다고 손가락질할는지 모르지만 난 지금도 몹시 가을을 탄다.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이 될 때가 있다. 공연히 쓸쓸해 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편지 속엔 인터넷 메일에선 결코 맡을 수 없는 사람의 향기가 있다. 모바일 폰 문자 메시지에선 읽을 수 없는 문자 너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 옛날이여.


태그:#가을 ,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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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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