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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딸아이)야, 다른 아이들에게 전화 한 번 해봐라. 고구마 캐러 가자고.”
“예. 알았어요.”

 

 

이렇게 해서 지난 11일 일요일에 모여든 마을 아이들과 함께 철 지난 ‘고구마 캐기’가 시작되었다. 10월 중순경이면 일반적으로 고구마를 다 캐낸다는 것을 감안하면 철이 늦은 게 사실이다. 이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올해 초 마을 뒷동산에다가 밭을 빌려서 시작한 서투른 농사. 거기에다가 콩도 심고 깨도 심고 고구마, 오이, 독고마리 등을 심었다. 하지만 워낙 땅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가 우리의 실력이 실력이니 만큼 농사는 전반적으로 실패작이었다. 거기다가 우리의 게으름(?)이 큰 몫을 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

 

고구마 수확도 애초에 포기하고 있다가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을 날로 잡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농법을 자연농법(사람의 손을 될 수 있는 대로 대지 않고 자연의 힘에만 의존해서 키우는 농법)이라고 하거나 무심농법(작물에 욕심내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무심하게 키우는 농법)이라고 한다. 이런 두 가지 농법으로 고구마를 내버려 두었고, 설상가상으로 올해 워낙 비도 많이 와서 배수도 잘 안 되었으니 고구마 수확은 포기하기 딱 좋은 여건이었던 게다.

 

들꽃마을(마을 뒷동산을 우리가 이렇게 부른다)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이 발랄하다. 소풍가는 기분이다. 주위에서 보여주는 자연 작품들은 우리의 기분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하다. 처음 고구마밭에 도착한 아이들의 호미질과 괭이질은 경쾌하다. 게임 초반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들 '싱글벙글'이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랬다.

 

 

“에게게. 고구마가 뭐 저래 작은 겨?”

 

아이들의 야유에도 나와 아내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다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 탓이니 뭐라 할 것인가.

 

땅 속에 숨어 있다가 호미질 몇 번에 배시시 웃으며 불그스름한 얼굴은 내미는 고구마들이 신기하고 반갑다. 작든 크든 이미 우리에겐 상관이 없는 게다. 오히려 작으니까 일하기 수월하다는 장점도 있다. 작은 것들을 캐내다가 큰 것을 보면 왜 그리 반가운지. 아마도 큰 것들만 캐고 있었다면 큰 고구마를 보고도 별로 고마워하지도 놀라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작은 고구마가 얼마나 맛있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초반에 고구마 캐는 시범을 보이던 아내는 독고마리를 수확하러 밭두렁으로 간다. 이제 아이들과 나만 남았다. 초반이라 나는 고구마 캐는 것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니 아이들만 힘쓰고 있다.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고 우리 내외만 수확을 해도 충분히 할 분량의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두 번 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심어주고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일부러 ‘고구마 캐기 체험’을 한다며 돈 들여서 가는 것보다 이렇게 자연스레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우리의 생각이다. 그리고 초반에 기분이 좋아서 신나게 고구마 캐고 있을 때 사진을 찍어두고 뒤에 지쳐서 하지 않을 때는 내가 열심히 고구마를 캐려는 나의 잔머리(?)에 의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마 캐기 중반으로 가면서 아이들이 쓸쓸 짜증을 낸다.

 

“언제 가요. 힘들어요. 배고파요. 추워요.”

“조금만 기다려라. 집에 가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음식 해줄 테니까.”

 

아무리 중학생이라도 아이들은 아이들인가 보다. 언제 가냐고 보채다니. 그거야 고구마 다 캐면 가지. 그걸 몰라서 묻나. 그러더니 아이들이 이제 내 카메라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가을 들녘도 찍고 내가 고구마 캐는 모습도 찍고. 급기야는 포즈를 취하며 서로 사진 찍어주기를 한다. 아이들은 이제 아예 고구마 캐는 것은 잊어버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 내 계산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게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놀게 하고 나는 열심히 고구마를 캐낸다. 사실 아이들이 초반에 고구마를 캔 것의 세 배 분량은 내가 캐낸 것이다. 아이들은 겨우 흉내만 낸 게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사진도 찍고 뛰어도 다니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다가 그것조차도 힘이 드는지 슬그머니 고구마를 캐고 있는 내 옆으로 온다. 이제 언제 가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노는 것도 지쳤는가 보다.

 

딸아이가 내 옆으로 와서 호미를 잡는다. 고구마를 다 캐야 집에 간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깨달은 게다. 물론 그전에도 알고 있었겠지만, 놀고 싶어서 일부러 그 사실을 외면했던 게다. 이제 정말로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진 것이다. 조그만 아이들 같았으면 무작정 보챘을 상황이지만, 그래도 중학생들인데 그럴 수야 있나. 나를 도와서 빨리 고구마를 다 캐야 집에 간다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이렇게 막판 서포팅을 하니 고구마 캐는 속도도 빨라진다. 멀리서 독고마리를 따고 있던 아내도 거의 일이 끝났다. 다 캔 고구마를 모으니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제법 된다. 독고마리도 몇 봉지나 된다.

 

 

그렇게 우리는 수확물을 거두어 가을을 메고 집으로 향한다. ‘만선의 기쁨’보다 이제 집에 가서 밥도 먹고 쉴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큰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밭에 갈 때는 소풍가는 기분이라 좋았고, 집에 갈 때는 휴식하러 가는 기분이라 역시 좋다. 이렇게 몸으로 노동하는 게 좋은 것을 사람들은 알까 모르겠다.

 

“우리는 하나(나의 딸아이)한테 속았어. 잠시 한다더니 이렇게 시간이 걸리고 말야.”
“아냐. 나는 아빠한테 속았어. 진짜 잠시 한다고 그러셨거든.”

 

사실 속인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선입견으로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으면서 나에게 화살을 돌린다.

 

그런 백성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아내의 음식실력이 발휘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든다. 바로 쫄면과 ‘라볶이(라면과 떡볶이 혼합 요리)’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몇 배로 맛있다며 그저 즐겁다. 조금 전 원성은 온데간데없다. ‘시장이 반찬’이랬으니 무얼 먹은들 맛이 없었겠느냐마는 아내의 음식 솜씨와 아이들의 기호에 맞는 음식메뉴가 먹는 기쁨을 배로 추가시킨 게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오늘 아이들과 함께 ‘들꽃마을’에서 가을을 느끼며 가을을 거두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보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더아모(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은 경기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duamo 이며, 본인은 이곳의 목사이다. 


태그:#더아모의집, #송상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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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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