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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휴일이었다. 집안 청소를 마치고 집회가 예정된 시청 앞에 가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서점에 들러 사막을 숲으로 가꾼 중국여인 인위쩐의 이야기를 읽고 감동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여느 일요일과 다르지 않은 편안한 휴일이었다.

 

철저하게 봉쇄된 경찰들의 봉쇄를 뚫고 어렵게 집회 장소에 참여해 집회 이모저모를 촬영할 때만 해도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그러나 공식 행사를 마치고 거리시위에 투쟁이 진행되면서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집회 장소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시청에서부터 광화문 일대는 경찰에 의해 완전 봉쇄되었다. 전국의 노동자 농민들이 총궐기하는 집회를 계획했지만 정부는 이번 집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원천 봉쇄하였다. 전국적으로 모든 고속도로 톨게이트들을 차단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 봉쇄를 뚫고 많은 참가자들이 바리케이드가 쳐진 시청 앞에서부터 남대문까지 도로를 가득 메웠다. 전국 산별 노조원들과 농민단체 회원들로 구성된 집회 참가자들은 쌀쌀한 날씨도 아랑곳 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아젠다를 모든 국민들에게 천명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선 것이다. 지난 날 붉은 악마의 함성으로 가득 채웠던 곳,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뜻을 모으기 위해 모인 곳! 그곳에 오늘은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을 위한 대규모 집회가 열린 것이다.

 


매년 이맘때 전태열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개최되는 노동자대회와 농민의 날을 맞이해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는 '범국민 행동대회' 성격의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것이 바로 오늘의 집회였다. 특별히 노동 단체의 핵심 아젠다인 한미 FTA 저지, 비정규직 철폐 등을 핵심 투쟁 내용으로 천명한 집회였다. 
 

  

집회에 참석한 많은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수한 백성들이었다.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자본가들과 권력으로부터 권리에 상처를 입은 우리의 백성들이었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었다. 저들은 모두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 아래, 민중들이 평화롭게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변화된 세상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도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 운동으로 한 평생을 바쳐온 저들의 염원 역시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와 FTA로 인한 노동자 농민들의 상처를 막기 위한 마음이 간절한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이들의 모임에 동참할 겸, 취재도 할 겸 이렇게 이곳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오늘 집회의 중심에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있었다. 그 역시 한 평생을 노동자들을 위해서 살아온 투쟁가였으며, 지금은 노동자들의 집권을 바라는 마음으로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 후보로 또 한 번 나선 사람이었다.

 

권 후보는 정권교체를 앞세우며 ▲한미 FTA의 국민투표 제안 ▲비정규직 악법 폐지 및 새로운 법 제정 ▲삼성 비리에 대한  특검실시 제안 등 3개 항을 요구하면서 12월 19일을 민중의 승리의 날로 삼아 새로운 세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대부분의 내용들이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노동자들과 함께 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차들이 지나가야 할 도로를 점유하고 거리투쟁에 나섰을 때에도 나는 그럴만한 충분한 대의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거리시위로 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겠지만 노동자, 농민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불편함 쯤은 저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기회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를 포함해 거리로 나선 모든 시위 참가자들도 그런 합리성에 의해 떳떳하게 도로 위를 걸었을 것이다.

 

평화로운 시위 문화를 위해서 가급적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나의 생각이었지만 일년 중 한 번쯤은 더 고통스러운 노동자, 농민들을 위해 우리의 편리를 조금 양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까지는 충분히 양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화문으로 가는 모든 길이 봉쇄되고 시위대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저지 선 앞에 이르자 집회의 상황도, 나의 판단도 조금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는 경찰 헬기들이 불법 시위 해산을 강조하는 방송과 사이렌을 울리며 시위 지역 주변을 맴돌았다. 안국동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대로는 경찰들의 바이케이드가 설치되어 시위대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저지선을 뚫기 위해 나서는 시위대를 향해서 물세례가 퍼부어지기 시작했고, 시위대들 가운데 일부는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등 본격적인 대치가 시작되었다. 대치 상황에서 간간이 충돌이 이뤄지던 시위 현장에서는 격렬한 투쟁이 진행되었다. 전경들이 시위대원들 중 한 명을 에워싸자 시위대원들이 전경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서로 밀고 밀리는 투쟁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거리투쟁의 장은 일순간에 폭력적 상황으로 바뀌었다. 집단적인 광기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아차 싶었다. 아직도 민주화 이전의 시위 상황이 재현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최루탄과 화염병만 없을 뿐, 그 나머지 모습은 20년 전 그 때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간헐적인 폭력 상황이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서 부상자들이 나왔다.

 


단순 부상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 시위대원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상황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나중에 시위가 좀 진정되는 상황에서 시위대 뒤로 빠져나오면서 급하게 후송되는 모습만을 보았다. 누가 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순간 혼란스러웠다. 정황으로 볼 때 당연히 그는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를 당함으로써 저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정말 처참하고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앰뷸런스로 옮겨지는 불쌍한 한 시민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그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집회가 마치고 시위대는 3군데로 나눠져 거리투쟁에 들어갔다. 나는 롯데와 종각을 지나 안국동으로 향하는 시위대를 따랐다. 중간에 국세청 앞으로 나가던 그룹을 따라갔지만 원천봉쇄되어 더 이상 나갈 수 없자 그 그룹은 안국동으로 다시 집결하였다. 서둘러 안국동으로 가니 이미 물세례가 퍼부어지고 있었고, 간헐적인, 그러나 서서히 격렬한 시위가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서 시위대가 전경들에게 붙들리고, 또 전경들이 시위대에게 붙들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시위 촬영은 처음이었던 나는 전경 한 명을 붙잡은 일단의 시위대를 촬영했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 시위대원들 중 일부가 내게 달려들어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다. 아마도 경찰측에서 촬영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나는 시민기자임을 밝히고 사진을 삭제하겠다고 했지만 저들은 막무가내였다. 집단적 광기가 인간의 이성을 어떻게 억누르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카메라에 달려 있던 플래시가 파손되고 얼굴 몇 군데가 찢어져 피가 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순식간에 당한 그 끔찍한 상황에서 이성적 대처는 불가능해 보였다. 애써 이성적으로 대응하려고 했지만 밀려드는 광기는 아무런 노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 카메라마저 파손될 위험을 가까스로 넘긴 나는 저들이 보는 앞에서 사진을 삭제한 후 겨우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경험을 추스리면서 나는 나 자신과 지금의 거리투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민주화와 건전한 시민의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던 나였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권리를 위해 항상 저들의 편에 서 있던 나였다. 이번 대선에서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받는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그리고 나의 그러한 의식은 투쟁에 나선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회 장소에서 편안하고 공감이 가는 마음으로 저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러한 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하게 저들을 지지하는 나였지만 그 폭력성까지도 지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참석자들 중 절대 다수는 순수하게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이곳에 온 건전한 시민들일 것이다. 저들도 나와 같이 폭력적인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건 현실이었다.

 

처음 당해본 격정적 상황으로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즈음 시위대들은 전경들에 의해서 멀리 밀려났다. 어느 덧 나는 전경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선 나의 심정은 또 다시 혼란스러웠다. 10여년 전 이스라엘에 배낭여행을 할 때도 그런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들어간 나는 베들레헴을 돌아보고 라헬의 무덤을 찾아갔다. 아랍인이 운영하는 택시를 탄 나는 얼마쯤 가서 바리케이드가 쳐진 경계에서 내리게 되었다. 저들이 나를 태워줄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라는 것이었다.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는 철조망 너머로는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곳이 분쟁지역이란 것 알았기 때문에 순간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철조망 너머에서 무장한 군인들은 나를 향해 그 철조망을 밟고 넘어오라고 손짓했다.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철조망을 넘었다. 그 철조망 너머에 라헬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일 없이 라헬의 무덤을 둘러본 나는 다시 철조망을 넘어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나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그 때 그 철조망 너머에 있던 무장한 군인들은 이스라엘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랍의 본거지에 있을 때는 별로 위험을 느끼지 않다가 철조망 너머에 있는 이스라엘 진영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집회 참가자들과 같은 정신을 공유하고 있던 나는 정작 그들로부터 위험을 느꼈다. 그러나 전경들이 있는 곳에서는 오히려 안전함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지인가? 누가 정당하고 누가 부당한가? 누가 폭력적이고 누가 비폭력적인가? 누가 권력자이고 누가 억압자인가? 정말 혼란스러웠다.

 


대회 대표 연설을 끝내고 기자들 앞에 선 권영길 후보를 잠깐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얼마나 목이 탔던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투쟁 노선에 늘 공감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그 투쟁 수단이 폭력이라면 나는 거기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생명과 평화를 위해 연약하지만 참된 평화주의자로 살고자 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노총의 투쟁수단은 평화주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상대가 공권력의 폭력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응전이라고 말해도 수용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평화주의자들이지만 일부 집행부들의 폭력적인 점도 있다고 변명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폭력이며, 무엇을 위한 폭력이란 말인가? 그것이 누구를 향한 폭력이든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지금까지 내가 지지했던 그 사람들이 내 가치관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정말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오늘의 기억은 늘 진보의 가치를 앞세웠던 내 삶의 한 가운데서 진보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급진주의는 곤란하다. 나는 급진주의까지 포용할만큼의 여유는 아직 가지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일체의 폭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권영길 후보도 그래야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을 배제한 평화주의적인 민중의 지도자로 서야만 지지가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에서야 나는 나의 진보와 다른 사람들의 진보의 차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조건 저들의 편에 서서 저들을 지지할 수만도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아! 이 혼란스러운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마음을 추스릴 수 있을 것인가? 정말 혼란스러운 하루의 기억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 개인 블로그에 게재하였습니다.


태그:#전국노동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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