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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필요한 것은 휴지밖에 없는 듯 했어요.
▲ 없는 것이 없는 우리 동네 마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필요한 것은 휴지밖에 없는 듯 했어요.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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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키가 작으면 남편 쪽에서 키를 줄이라." - 탈무드

검약정신

이웃의 노부부를 '마트'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지만, 이분들은 절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요. 약간 서운했지요. 그러나 요즘의 아파트는 옆집에 살아도 얼굴을 모르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우리 동네 마트는 오만원 이상 사면 배달이 가능해, 나는 사고 싶지 않아도 무겁게 들고 가기 싫어서 불필요한 것도 이것저것 샀습니다. 그런데 수레를 밀고 다니다가 마주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무얼 사시는 것보다 '아이쇼핑'을 즐기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사자고 하면, 할머니는 지금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분께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속삭이듯이 다투기도 하고 핀잔을 주는 아이쇼핑이 끝날 즈음, 나의 마트에만 오면 살 것이 자꾸 많아지는 비경제적인 쇼핑도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상당 시간 먼저 나가신 두 분을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다시 만나, 본의 아니게 뒤를 밟듯이 따라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다리 아파요." "할멈, 힘내라구."
 "아이고, 다리 아파요." "할멈, 힘내라구."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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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구매 자제력 배우다

그런데 두 분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두 분께서 상당 시간을 들여 사신 것이 고작 두루마리 휴지 한 묶음과 감 두 개 정도라는 사실에 매우 놀라웠습니다.

없는 것이 없는 '마트'란 곳은 살 것만 사게 하는 곳이 아닌 살 것이 아니라도 사게 만드는 곳인데 말입니다. 두분의 자제력에 감탄했습니다. 나는 걸음의 속도를 그분들에게 맞추어 바싹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두 분의 대화는 들리다 끊어지는 듯 들려왔습니다.

"임자, 휴지 같은 건 가까운 구멍가게에 사면 되지…,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리도 불편한데 집까지 언제 가겠는가?"

할아버지가 약간 불만스러운 듯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습니다.

"이 양반이 우리 동네에 구멍가게가 어디 있어요? 아파트 슈퍼는 마트보다 3배나 비싸단 말이에요. 아무리 그렇지만 3배로 남겨 파는 데가 그게 슈퍼에요?"

두 분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이어지고, 휴지 20개 정도 든 휴지 묶음의 무게는 얼마 되지 않을 듯한데, 두 분의 걸음걸이는 자꾸 늦어졌습니다.

점점 어두워오는데 노 부부의 걸음걸이는 자꾸 늦어집니다.
 점점 어두워오는데 노 부부의 걸음걸이는 자꾸 늦어집니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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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추

두 분이 워낙 힘들어 보여서, "제가 들어드릴까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두 분이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그 틈에 끼어들기가 망설여졌습니다.

한평생 해로한 노부부의 정답지만 싸우는 듯한 대화에 이끌려 저는 보도블록에 떨어진 낙엽을 줍는 양, 주위의 아파트 창문을 쳐다보는 양, 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두 분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어 걷다 보니 1km 안 되는 거리까지 오는데 그만 뉘엿뉘엿 해가 지고 이제 캄캄한 어둠이 내렸습니다.

"봐, 캄캄하잖아?" "영감, 저기 달 좀 봐요?"
 "봐, 캄캄하잖아?" "영감, 저기 달 좀 봐요?"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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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물 베기의 사랑

"영감 아무래도 나 안 되겠어요. 저기 좀 앉았다가 가요."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그거 보라구. 내가 뭐라고 했어? 혼자 집에 있으면 내가 얼른 휴지를 사 올텐데… 꼭 따라와서… 힘들잖아. 이제 앞으로 휴지 같은 건 좀 비싸도 구멍가게에 사자구."

"영감, 저 달 좀 봐요 ? 너무 환해요."

"달이 환한 거 처음 봤어?"

"영감… 미안해요."

두 분이 일어서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할 수는 없어 발걸음을 먼저 재촉했습니다. 휴지 하나 사기 위해 하루의 나들이로 잡은 노부부의 일상 속에 흘러나오는 대화 속에서, 서로를 끔찍하게 생각해 주고 위해주는 부부 일심동체의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 받았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씨는 무뚝뚝해도 할머니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빛에서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져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부부란 두 개의 반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는 고흐의 말이 문득 떠올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이혼 소식도 씁쓸하게 떠올려졌습니다.

노란 달이 자꾸 따라오는 귀갓길, 낙엽은 발밑에서 사각사각 소리내며 무언가를 속삭이는듯 이 만추의 아름다움을 노부부의 나직나직한 속삭임처럼 들려주었습니다.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 서정주 '무등을 보며'


태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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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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