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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과 무을풍물 가락이 어우러진 금오산 잔디광장. 축제의 배경이 된 금오산이 아름답다.
 단풍과 무을풍물 가락이 어우러진 금오산 잔디광장. 축제의 배경이 된 금오산이 아름답다.
ⓒ 한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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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내륙 최대의 수출단지이자 국가산업단지로 알려져 있는 경북 구미시에는 금오산이라는 명산이 시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금오산은 글자 그대로 풀자면 쇠 금(金) 까마귀 오(烏) 즉 ‘황금까마귀산’이다. 태양의 새인 삼족오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금오산의 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지난 일요일(11월 4일).

오색빛이 찬란한 금오산은 풍물가락에 취해 더욱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사람들로 덩실거렸다. 바로 '2007무을풍물축제'의 흥겨운 한마당이 펼쳐진 것.

무을풍물보존회(회장 황진일)가 주관하는 무을풍물축제는 구미시 무을면이 태생지로 영남풍물의 모태격인 풍물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행사다.

객원으로 출연한 차오름예술단 어린이단원의 상모돌리기가 앙증스럽다.
 객원으로 출연한 차오름예술단 어린이단원의 상모돌리기가 앙증스럽다.
ⓒ 한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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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도시로만 여겨졌던 구미가 영남 풍물의 발원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정말?’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인 조선 영조시대 구미시 무을면 삼송리 수다사에서 탄생한 무을풍물은 시대를 거치는 동안 영남뿐 아니라 전국 풍물의 중요한 씨앗 중 하나가 됐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차 퇴색돼가는 무을풍물을 보존해가기 위한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옛 명성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며, 날 좋은 가을에 수다사와 금오산에서 이틀간 축제마당을 마련하는 것도 그 연유 때문이다.

그 뿌리가 오래되다 보니 이날 행사에는 김제농악보존회, 창원퇴촌농악보존회, 사물놀이 연구회 울림터, 차오름예술단과 구미문화원선주풍물단, 선산선주풍물단, 한대양포풍물단, 한두레예술단, 구미놀이패 말뚝이, 도량동풍물단, 선산풍물보존회, 구미시공단풍물단, 가락젓대 등 다양한 풍물단들이 함께 참여했다.

풍물옷 입어보기와 제기차기, 투호놀이 등 민속놀이와 그동안 무을풍물의 활동상이 담긴 사진전도 열렸다. 사진전은 무을에서 사진생태마을 촌장으로 있는 한태덕 선생이 다년간 찍어온 무을풍물단 공연 사진들과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풍물단 사진들이다.

무을풍물의 역사가 담긴 사진전을 동네어르신들이 둘러보고 있다.
 무을풍물의 역사가 담긴 사진전을 동네어르신들이 둘러보고 있다.
ⓒ 한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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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을풍물은 태백산맥 줄기인 연악산 아흔아홉곡의 지맥이 합쳐진 명당에 자리 잡은 수다사라는 절에서 시작됐다. 신라의 고찰인 수다사는 신라 진감국사가 연악산 꼭대기에 백련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곳을 보고 절을 지어 연화사(蓮花寺)라고 했으며 사명대사에 의해 중수돼 수다사라 개칭됐다는 역사를 안고 있다.

무을풍물은 그 발원지가 사찰인 ‘수다사’이고 만든 이가 바로 스님이라는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법명은 전해지지 않는 정재진이라는 스님이 꿈속에서 도깨비들과 놀고 장난쳤던 일들과 구전되어 내려오던 내용을 소재로 풍물가락을 만들어 마을로 전파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근대에 회자되던 이야기 속에는 “정재진 나고 메구 나고 엄복동 나고 자동차 나고 안창남을 위해 비행기가 나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무을풍물은 웅장하고 장쾌한 가락으로 전투농악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소고놀음이 발달돼 있고 다섯째 마당인 ‘품앗이’ 등으로 볼 때 농사굿 형식도 지니고 있다. 또한 스님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만큼 열두 번째 마당인 ‘영산다드래기’와 석탑을 의미하는 삼단 고깔을 쓰기도 해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풍물이다.

무을풍물 발원지인 수다사에서 무을풍물축제의 첫 장을 여는 공연이 펼쳐졌다.
 무을풍물 발원지인 수다사에서 무을풍물축제의 첫 장을 여는 공연이 펼쳐졌다.
ⓒ 한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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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 인원은 쇠 4명, 징 4명, 북 8명, 장구 8명, 소고 12∼16명, 잡색 3명(포수, 각시, 양반), 기수 4명(농기1, 단기1, 영기2) 등 총 45명 내외이며 인사굿인 ‘질굿’을 시작으로 마당닦기(반죽궁), 정적궁, 엎어빼기(도르래기), 품앗이, 수박치기(영풍굿), 허허꺽꺽, 너도나도 둘이 돌기(기러기굿), 이돌기(돌다가 되돌려빼기), 진풀이(멍석말이), 판굿, 영산다드래기 등 총 12마당의 연행으로 펼쳐진다.

우수한 예술성과 힘차고 박진감 넘칠 뿐 아니라 행위가 다양한 영남 풍물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무을풍물은 그 전승 계보가 뚜렷하다. 정재진 스님이 처음 만들고 이군선이라는 상쇠가 12마당으로 집대성해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경지에 올려놨다.

이후  박희순, 최일영, 윤필선 등의 제자가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많은 쇠군들이 쇠를 배우기 위해 무을을 찾았고 이때부터 무을풍물이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한다.

최일영 상쇠는 김신배, 김팔금 등 당대의 훌륭한 상쇠를 키웠고 이남문 상쇠는 6.25전쟁 이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로 이사해 빗내농악을 남겼으며 최상택 단원은 부산으로 이주해 ‘아미농악단’ 창단에 기여했다.

1965년 농악경연대회에 참석하고 김천 직지사에 들러 찍었다는 기념사진.
 1965년 농악경연대회에 참석하고 김천 직지사에 들러 찍었다는 기념사진.
ⓒ 무을풍물보존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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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60년대 무을에는 상면농악단과 하면농악단이 경쟁하며 농악을 발전시켰는데 하면농악단의 김칠봉 상쇠는 전국의 각종 농악경연대회에서 많은 수상을 했으며 상주농잠고와 김천농림고에서 초대 농악교사로도 활동했다.

김신배 상쇠가 이끄는 상면농악단은 구미지역은 물론 인근에서까지 초청돼 시연과 전수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이때가 무을풍물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이후 중심 상쇠들이 세상을 뜨고 명맥만 유지되던 무을풍물은 90년대 지역에 있는 최무웅 상쇠가 인천으로 이주했던 지창식 상쇠를 모셔와 무을풍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며 199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농악부문 우수상 수상과 200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현재 박원용 상쇠로 그 가락이 이어지고 있는 무을풍물은 2002년 수다사에 그 유래비가 세워지고 2003년 12월 무을풍물보존회(회장 황진일)가 결성되면서 영남풍물의 모태로서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

소북을 잘 쳤다는 김창선단원이 한 어린이와 찍은 기념사진 195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소북을 잘 쳤다는 김창선단원이 한 어린이와 찍은 기념사진 195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 무을풍물보존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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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금오산에서 무을풍물축제에서 멋진 풍물가락을 선보인 사물놀이연구회 울림터의 대표 최병삼씨는 바로 부산농악의 전신인 아미농악단 창단을 위해 큰 역할을 했던 최상택씨의 삼형제 중 막내아들이다.

최병삼씨는 “부산무형문화재인 부산농악의 전신이 아미농악단이며 그 전신이 무을풍물이니 부산농악의 모태는 무을풍물”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가락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는 최대표는 지금이라도 무을풍물의 가치를 널리 알려야 된다고 역설했다.

산업도시라는 이면에 가려 그동안 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무을풍물이라는 중요한 전통문화가 축제를 통해 영남풍물의 모태로서 재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인지 내년의 무을풍물축제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무을풍물축제의 막바지에는 참여 풍물단체와 관람객이 어우러져 흥겨운 자리를 가졌다.
 무을풍물축제의 막바지에는 참여 풍물단체와 관람객이 어우러져 흥겨운 자리를 가졌다.
ⓒ 한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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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무을풍물 , #구미, #전통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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