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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기는 가장 내밀한 기록이다. 이때 우리가 ‘내밀(內密)한’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이다. 하나는 일기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현실 세계보다는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내면의 세계’가 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것은 마치 남의 속옷을 들추는 것과 같은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진다.

또 하나는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일기는 ‘비밀스러운 기록’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지내느라 속병이 난 이발사가 아무도 없는 숲에 가서 그 사실을 외치고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는 남에게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일기에다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여나 그 비밀이 탄로날까 봐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은 비밀스러운 곳에 일기장을 보관한다.

내밀한 기록으로서 일기가 갖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탐구에 바쳐지는 열정과 혼돈의 시간인 젊은 날의 일기에서 특히 자주 발견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젊은 날의 일기를 다시 펼쳐 읽어보면 우리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당시에는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들이 참으로 유치한 관념의 유희였다는 것이 발견된다. 또, 죽고만 싶도록 부끄러운 일도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든이 넘은 프랑스의 노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앙드레 말로의 말을 빌려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자신의 내면세계에 골몰하는 일이란 ‘자질구레하고 한심한 비밀들의 무더기를 들여다보면서 눈물로 엄살떠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권한다.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문밖으로 나가서, 경이와 찬미를 자아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현실 세계를 만나보라고.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 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125쪽)

미셸 투르니에가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 말은, 그가 그 동안 일기 형식으로 써놓았던 토막글들을 월별로 모아서 펴낸 이 산문집에 왜 ‘내면일기’가 아니라 <외면일기>라는 이색적인 제목을 붙이게 되었나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2.

<외면일기>
▲ 책표지 <외면일기>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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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미셸 투르니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현실 세계로 시선을 돌려서 포착한 풍경을 담고 있는 <외면일기>는 일반적인 ‘내면의 일기’와는 어떻게 다른가?

우선 그 어조가 말할 수 없이 여유롭고 유쾌하다는 점을 들어야겠다. 파리 근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옛 사제관에서 결혼도 안 하고 50년 가까이 혼자 살고 있는 늙은 작가에게서 느껴질 법한 고독감이나 우울한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검진에서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판정되었는데도 그는 태연자약, 아니 오히려 기분 좋아한다.

블리니 종합병원에서 초음파 심장검진을 받다. 대수롭지 않은 검사이거니 했는데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같은 불쾌한 소음이 기계를 통해 들렸다. 내 심장이 내는 소리라고 했다. 검사 결과 분명한 심장비대임이 판명되었다.

나는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14쪽)

이제 죽음까지도 가까이하면서 지내야 하는 나이에 그가 접어들었기에 이러한 달관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살아 있는 매순간을 경이와 찬미의 마음으로 맛보고자 하는 낙천적이고 낙관적인 그의 인생관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그가 쓴 많은 산문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유머는 이러한 긍정적인 인생관의 소산일 터인데, 이 책 <외면일기>에서도 곳곳에 촌철살인적인 유머가 번뜩여서 읽는 이를 즐겁게 해준다. 하나하나 거론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그러한 유머 가운데, 내게 가장 압권으로 다가온 것은 다음 구절이었다.

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 “오, 천사로구나!’ (154쪽)

어둠 속에 사는 흡혈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믿지 못할 배신자 등 나쁜 이미지로만 떠오르는 박쥐가 순식간에 천상의 존재로 승격되는 이 놀라운 변신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저 아래 땅에 바짝 붙어살아 가는 생쥐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셸 투르니에는 전혀 다른 높이와 자세로 이 세계를 바라다봄으로써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때로는 우리가 통념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인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역설적인 진실들은 너무나 명료한 것이어서 우리는 반박조차 할 수 없다.

병의 기능. 건강을 유지하려면 때로 병을 앓기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신체기관을 경계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마치 말들과도 같아. 내가 자리에 눕게 된다면 그건 죽는다는 뜻이야.” 우리는 아버지가 앓아누우신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병들이 한꺼번에 병발하여 불과 며칠 사이에 무너져버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놀라서 정신을 못 차렸다. (211쪽)

병의 기능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하려는 내 입은 이어지는 글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다물어지고 만다. 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역설이 있는 것인가?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데, 이 노작가는 한눈에 그걸 알아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내고 있으니 놀랍다. 그래서 그가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인 빅토르 위고는 ‘젊은이의 눈에는 불꽃이 보이지만 늙은이의 눈에서는 빛이 보인다’고 말한 것일까?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는 내면으로만 향해 타오르는 젊은이의 불꽃이 다 꺼지고 난 뒤에 보다 원숙해진 늙은이의 빛나는 시선으로 잡아낸 세상과 삶의 기록이다. 1월 비엔나의 신년 음악회에서 두 팔을 휘젓고 있는 지휘자의 춤에 대한 재미난 관찰에서부터 12월 추운 밤 침대에서 자세를 바꿈으로써 맛보는 급격한 근육의 도취감에 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3.

이렇게 <외면일기>는 노작가가 일상적 삶 속에서 마주치는 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사물들, 사람들, 사건들 및 현상들에 대해서,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며 기지에 찬 역설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어서 한번 눈을 주었다면 결코 외면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짤막짤막한 토막글들이 이어지는 형식이지만 끝까지 한달음에 읽게 된다.

그리고 부록으로 실린 김화영 교수의 인터뷰는 덤이지만 본문 못지 않은 맛깔 난 덤이어서 매우 즐겁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을 번역할 때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노작가를 직접 찾아가서 그의 근황을 살가운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김화영 교수가 이번에는 직접 사진을 찍어 왔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는 노작가의 모습은 밝고 환하고 아직도 건강해 보인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 노년의 작가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자문하는 김화영 교수처럼 나도 마음 한 구석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외면일기>의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죽음 부인’의 두건 쓴 실루엣 때문이다.

나의 죽음. 나는 죽을 결심쯤이야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 세상 전체가 나와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 전체가 다 송두리째 나의 재현인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어린 아이들, 동물들, 식물들, 풍경들, 그 모든 것이 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내 목을 자른다면 모두가 다 사라져버린다. (227쪽)

그의 말처럼, 이 책이 제공하는 웃음의 기회에 그 부인은 보다 더 심오한 메아리를 보태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메아리보다는 그의 육성을 아직도 더 듣고 싶다. 위대한 작가의 죽음은 죽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몹시도 사랑하는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이 세상 전체가 무너지는 슬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건강과 장수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외면일기 (Journal Extime)

ㅇ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지음
ㅇ 김화영 옮김
ㅇ ㈜현대문학 펴냄
ㅇ 2006년 11월 6일 초판 8쇄
ㅇ 값 11,000원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2004)


태그:#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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