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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취리히(Zürich)에서 출발한 기차는 북쪽을 향하면서 라인강변의 보석 같은 풍경을 안타깝게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40분을 달린 기차는 독일 국경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도시 샤프하우젠(Schaffhausen)에 도착했다. 라인강 상류의 우안에 자리한 샤프하우젠은 독일 땅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는 스위스령이다.

 

나는 역에 내려서 역명이 적힌 이정표를 보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독일어 알파벳으로 적힌 ‘샤프하우젠(Schaffhausen)’이라는 도시명이 읽기가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는 역에 내려서 배가 그려진 과일 음료수와 미네랄워터를 각각 1병씩 샀다. 여름날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기에 우리는 걷기 운동을 하기 전에 항상 물을 준비했다.

 

우리 가족에게 샤프하우젠은 스위스 루체른에서 독일 뮌헨으로 가는 여정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환승역이었다.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위스 북부 끝에 자리한 이 도시가 매우 궁금했고, 시간이 되면 이 도시를 답사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나는 가족이 일정 기간 동안 자유롭게 열차를 탈 수 있는 유레일패스를 가지고 있어서, 샤프하우젠에서 잠깐 쉬어간들 여행의 일정이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가족은 여행 짐을 샤프하우젠역에 넣어두고 가볍게 역 밖으로 나섰다. 역 앞에 서 있는 노란색 일색의 전차와 버스가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스위스 샤프하우젠주의 주도(州都)로서 바젤(Basel)과 함께 스위스의 북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샤프하우젠은 라인강에서의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샤프하우젠’의 ‘샤프’는 배를 뜻하고, ‘하우젠’은 집을 뜻하니, 배로 된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도시이다.

 

이 도시는 우리나라의 여행 가이드북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도시이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역에서 건널목을 건너자 바로 샤프하우젠 구시가의 중심가가 펼쳐졌다. 세월의 이끼가 쌓인 탄탄한 돌길이 발바닥에 부드럽게 닿고 있었다.

 

나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이 도시의 중세 건축물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샤프하우젠이 꼭꼭 숨겨진 보석 같은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매력적인 거리를 걸으면서 작은 설렘 같은 것을 느꼈다. 마음속에서는 다시 두 가지 감정이 함께 교차했다. 그 감정은 이 도시를 발견한 뿌듯함과 곧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었다.

 

샤프하우젠 구시가지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건물마다 불쑥 튀어나온 화려한 돌출창문, 오리엘 윈도우(Oriel window)다. 이 구시가지 대부분의 건물에 이 예쁜 돌출창문이 붙어 있는데, 중세의 모습 그대로 창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참으로 로맨틱하다.

 

나는 운치 있는 집들로 가득 찬 보데어 거리에 들어섰다. 이 거리에는 건물마다 기품 있는 돌출창문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1777년에 지어진 길드하우스(Guild House)의 돌출창문은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다. 이 거리에는 유리세공의 집, 재단사 길드 하우스, 기사의 집, 잉꼬의 집 등 사랑스러운 돌출창문으로 장식된 집들로 가득하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창문 장식들은 마치 거리를 구경하러 튀어나온 듯한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세밀하게 조각된 철제 장식과 파스텔 톤의 은은한 채색, 아담한 모양이 참 기이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건축물들에 유난히 창문이 많지만 모든 창문을 돌출창문으로 만들지 않고 한두 개의 창만 돌출로 만드는 것도 참 독창적인 발상이다.

 

이 오리엘 윈도우는 18세기경에 샤프하우젠에서 라인강의 무역으로 부를 쌓은 상인들이 자신들의 부유함을 과시하려고 지은 창문들이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에 설치된 바로크 건축양식의 오리엘 윈도우는 부조화 속에서도 어울리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작은 도시 샤프하우젠 건축물들의 묘한 매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볼거리들은 유구한 건축물들의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샤프하우젠의 독특한 풍경은 건물 외벽에 그려진 벽화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돌출창문만큼 많지는 않지만, 샤프하우젠 시내에는 샤프하우젠의 중세 역사를 알려주는 프레스코 성화가 가득하다. 샤프하우젠 건축물들의 화려함은 한순간에 만들어진 테마파크의 허접한 화려함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보수되고 보존되어온 건축물들의 화려함에서 빛나고 있었다.

 

샤프하우젠의 거리에는 예상 외로 여행자들이 많았다. 대부분 유럽인들로 보이는 여행자들은 노천카페의 벤치에 앉아 한낮의 따사로운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스위스 관광명소마다 얼굴을 비추는 우리나라 여행자나 일본 여행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딸은 샤프하우젠 중심의 중앙광장에 들어섰고, 노천카페의 의자에 앉았다. 분수를 사랑하는 스위스인들답게 우리 눈앞에는 중세의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광장 한쪽에도 분수대와 함께 동상이 서 있고, 광장 반대편 귀퉁이에도 동상과 자그마한 분수대가 함께 있었다.

 

분수대 물은 너무나 깨끗하여 분수대에 고개를 숙이고 물을 받아먹는 사람도 있었다. 분수 위에는 높고 튼튼해 보이는 기둥이 한 개 서 있고, 그 기둥 위에 청동과 나무로 만들어진 한 인간이 서 있었다.

 

광장을 내려 보고 있는 이 사람은 샤프하우젠의 역사 속 수호신이다. 이 수호신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한 독립전투에서의 영웅이었다. 1501년, 스위스 동맹군 일원으로 참전한 슈바벤전쟁에서 승리한 샤프하우젠은 스위스 서약동맹의 정식멤버가 되었고, 스위스에서는 역사적인 스위스 13주 동맹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 영웅이 이제는 샤프하우젠 분수대의 꼭대기를 지키고 있었다.

 

분수대 기둥 아래쪽의 기다란 파이프에서는 수도꼭지에서처럼 흘러나온 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줄기는 괴기스러운 악마가 바람을 불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가서, 광장 반대편 분수대의 물줄기를 보았다. 그 물줄기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순한 양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샤프하우젠의 역사를 담은 인물상과 분수대 장식을 보면서, 분수대도 도시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이 흘러내리는 분수대 기둥 아래에는 빨간 제라늄 꽃이 분수대 주변을 온통 둘러싸고 있고, 꽃 아래에는 목재로 짜인 장방형의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런데 긴 주둥이에서 떨어지는 시원스런 물줄기는 꽃 위에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물 아래에 있지만 물과 만나지 않는 꽃송이들이 더 탐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계속 또 걸었다. 골목 사이로 시계탑이 보였고, 시계탑을 지나자 눈앞에 라인강이 불쑥 나타났다. 라인강은 바로 샤프하우젠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라인강의 거센 물살 때문에 강 상류의 샤프하우젠이 하천의 항구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고, 라인강의 물줄기를 이용하여 샤프하우젠은 수력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 전기는 샤프하우젠에 시계공업과 알루미늄 공업을 탄생시켰다.

 

정말 얄미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라인강은 인구 삼만 명이 사는 작은 강변도시를 빛내고 있었다. 나는 라인강을 따라 운항하는 저 운치 있는 유람선을 타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유람선 위에 있었다.

 

돌아오는 발걸음 속에서, 나는 샤프하우젠 골목길을 한곳이라도 더 보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다음 유럽 여행은 한나라만 여유 있고 한가롭게 둘러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짧은 여름휴가의 금쪽같은 시간들이 유럽의 각 나라들을 오가는 교통시간에 많이 소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프하우젠의 구도심을 빠져나오는 길에 체리와 산딸기를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체리 사진을 계속 찍는 나를 약간은 겸연쩍게 보시던 할머니는 이내 나에게 웃음을 보냈다. 체리와 산딸기는 할머니의 정갈한 흰 머리만큼이나 깨끗했다. 매콤한 체리의 맛을 보면서, 나는 샤프하우젠이 체리 같은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내 가족은 다시 독일로 들어가는 기차를 기다리러 샤프하우젠 역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탈 기차가 오는 플랫폼은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게끔 지하와 지상이 긴 경사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철제 의자에 앉아 다시 주스를 마셨다. 주스병이 워낙 커서 아직도 주스는 많이 남아 있었다. 딸은 스위스를 떠나는 게 아쉬운 듯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 편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7월말의 유럽 여행기록입니다. 유럽 여행에서의 여행정보를 공유하고 올바른 여행문화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샤프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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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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