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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퇴근을 하였다. 아내는 만날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은지! 설마 오늘도 늦으려나? 엊그제는 2박 3일로 마산까지 출장을 다녀와 피곤하기도 할 텐데….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마땅한 반찬거리가 없다.

 

오늘 저녁도 식사 당번은 내 차지인 듯싶다. 하는 수 없다. 묵은 김치에 돼지고기를 넣고 찌개나 끓여야겠다. 뜨끈한 밥에 걸쳐먹으면 딱 좋을 듯싶다. 김치냉장고에서 묵은 김치를 꺼냈다.

 

마침, 요란한 전화 벨소리가 들린다. 아내이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서일까? 호들갑이다.

 

"여보, 미안! 당신 벌써 들어왔어요? 나 지금 바로 출발해. 맛있게 밥 지을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런데 밭에서 배추 서너 포기만 뽑아놓으면 안돼? 쪽파도 몇 뿌리 다듬어 놓고."

 

결국, 명령조만 늘어놓더니만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전화를 끊는다. 볼품없는 배추는 뽑아서 뭐하라고? 배추 시래깃국을 끓일 모양이다. 며칠 전에도 먹은지라 오늘은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귀하게 여기면 하찮은 것도 보물

 

밖이 금세 어둑어둑하다. 채마밭에서 배추 네 포기를 뽑았다. 배추 꼴이 말이 아니다. 기분이 영 개운치 않다. 장사하는 사람 같으면 버리고도 남을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배추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200포기 남짓 심은 것 중 40여포기나 건질지 모르겠다. 우리 식구 김장거리도 되지 않을 듯. 가을 들어 비가 자주 온 데다 흐린 날이 많아 벌레가 많이 먹고, 속이 들어차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는 우리 배추를 귀하게 여기며 시래깃국이라도 끓이려고 하니 살림꾼은 살림꾼이다. 하기야 요즘처럼 배추 값이 비싸, 손수 가꾼 것이기에 알뜰하게 먹어야 하지 않는가?

 

농사지어 미리 거두는 법은 거의 없다. 제때를 기다려 다 자란 것을 거두는 게 당연지사! 그런데 올 김장배추는 시원찮다. 김장 때까지 기다려봐야 별 볼일이 없을 것 같다. 도나캐나 뽑아먹을 수밖에.

 

누구한테 뽑아 줄 수도 없다. 허드레 배추라도 귀하게 아는 사람이면 몰라도 이런 것을 어떻게 먹느냐고 하면 낭패가 아닌가! 주고도 욕먹는 형국이 될 수 있다.

 

그래도 배추 속은 멀쩡하네!

 

아내가 집에 오려면 한 30분은 기다려야 한다. 부엌에다 신문지를 펼쳤다. 배추를 다듬을 셈이다.

 

겉잎은 벌레들이 잔치를 벌였다. 구멍이 수도 없이 숭숭 뚫렸다. 또 배추 끝은 말랐다. 지금쯤 속이 꽉 들어차야 하는데 야무지지도 못하다.

 

아내가 하던 대로 배추 시래기를 삶아볼 셈이다. 배추 뿌리를 칼로 잘랐다. 겉잎이 떨어져나간다. 아주 못쓸 것은 버리고 시래기로 쓸 것은 따로 골랐다.

 

하나하나 벗겨내자 그래도 쓸만한 노란 속잎이 드러낸다. '어! 이것으로 겉절이를 담그면 되겠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경우가 배춧잎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허드레 잎은 시래기, 속잎은 겉절이라!' 다듬어놓고 보니 제법 쓸만하다. 노란 속잎을 먹어봤다. 부드러우면서 고소한 맛이 그만이다. 그래, 아내더러 겉절이를 담가달라고 하자! 시래기는 큰 들통에다 삶고, 보기 좋은 속잎은 깨끗이 씻어 소금에 절였다.

 

부엌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데,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급히 들어온다. 얼굴에 미안하다는 표정이 쓰여 있다.

 

"당신, 뭐해?"
"배추 속잎이 좋아서, 절여놓았지!"
"그래요? 생각보단 괜찮네!"
"시래기로 삶으려다 겉절이하면 좋을 것 같아서 골라냈지!"
"잘했어요. 이제 내가 다할 게, 당신은 쉬세요."
"알았어!"

 

자기가 할 일을 죄다 해줘 고맙다며 아내가 좋아라한다. 시래기 된장국은 다음에 끓이고, 겉절이만 해서 맛나게 저녁을 먹자고 한다.

 

김장 전 미리 담가먹는 배추 겉절이. 소금에 살짝 절여 쪽파, 고춧가루로 양념하여 버무려먹는다. 담근 즉시 먹으면 신선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가을의 풍미이다. 아내의 손맛을 기대해본다.

 

가을의 맛이 이것이다

 

배추가 숨이 죽을 동안 찹쌀풀을 쑨다. 양파와 쪽파를 다듬어 준비한다. 양파와 파를 써는 칼질에 힘이 붙는다. 이제 숨죽인 배춧잎을 찬물에 살짝 헹궈 채반에 받쳐놓는다. 씻어놓으니까 배추가 더욱 싱싱해 보인다.

 

찹쌀 풀을 풀어 고춧가루, 액젓, 다진 마늘과 생강, 설탕 등으로 양념을 만든다. 물기 빠진 배추를 넣어 손으로 살살 버무린다.

 

"여보, 고춧가루 색이 곱지?"
"우리가 애써 가꾼 깨끗한 가루잖아!"

 

곱게 빻은 고춧가루가 겉절이에서 빛을 발한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빨간 고춧가루로 버무려진 맛깔스런 겉절이가 침샘을 자극한다.

 

아내가 먼저 겉절이를 둘둘 말아 맛을 본다. 나한테도 한입 건네준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살핀다.

 

"좀 싱겁지 않아요?"
"그래 좀 삼삼하구먼. 새우젓을 조금 넣어 봐!"

 

새우젓을 조금 넣고 다시 버무린다. 간이 내 입맛에 딱 맞다. 마지막으로 참깨를 술술 뿌린다. 고소한 냄새에다 칼칼한 맛이 잘 어울린다.

 

볼품없는 배추가 이렇게 훌륭한 반찬으로 변할 줄이야! 행복한 밥상이 따로 없다. 시장기를 느낀 늦은 저녁, 맛있는 배추 겉절이로 밥 한 공기가 어느새 비워진다.

 

아내가 배를 깎아 후식을 준비한다. 나는 겉절이 담그는데 거든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오늘 김치는 누가 담근 셈이야?"
"그야 당신이 다 담갔죠. 나는 쬐끔!"

 


태그:#배추 겉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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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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