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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28일까지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공동 주최한 '2007피스&그린보트'가 진행됐습니다. 한일 대학생과 시민 등 600명이 승선한 피스&그린보트는 요코하마→하치노헤→쿠시로(이상 일본)→캄차카→사할린→블라디보스토크(이상 러시아)→부산까지 항해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STOP!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한 이번 항해에 함께한 강인규 시민기자의 승선기와 기항지 체험을 담은 글을 연속해서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해안에서 본 블라디보스톡 항구의 풍경. 블라디보스톡은 1860년 군사기지로 세워졌다. '동양의 정복자'라는 기원이 담긴 이름이 말해주듯, 블라디보스톡은 일본, 중국, 한국이 인접한 지역에 서 러시아의 군사 및 정치적 전략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해안에서 본 블라디보스톡 항구의 풍경. 블라디보스톡은 1860년 군사기지로 세워졌다. '동양의 정복자'라는 기원이 담긴 이름이 말해주듯, 블라디보스톡은 일본, 중국, 한국이 인접한 지역에 서 러시아의 군사 및 정치적 전략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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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31일을 기해 소련이라는 거대한 연방국가는 해체되었다. 이는 여러 가지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대등하게 맞서던 유일한 비자본주의 국가의 소멸이었다.

당시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를 '자본주의의 승리'로 환호했다.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라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체제이므로, 이 모순적 경제체제가 몰락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사회주의의 몰락이 '당연한 귀결'이었다면 이를 '승리'라고 부르며 기뻐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승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국민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현실사회주의가 완전히 힘을 잃은 때조차 미국 등의 자본주의국가는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데 적잖이 힘을 쏟았다. 국영상점 앞에서 줄을 선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이들의 단골메뉴였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사회의 미묘한 강박을 보여준다. 그것은 효율성의 우월함 밑에 자리잡은 도덕적 열등감일 것이다. 소유가 인간의 본성이라면, 소유하지 못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인간됨의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밤새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질주하던 배는 지난 7월 26일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에 항구에 도착했다. 서서히 몸을 드러내는 잿빛 구축함들이 군사기지로서의 블라디보스톡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적막한 해안에 떠 있는 군함이 이방인을 무겁게 압도하는 가 싶더니, 이내 일본기를 단 호화유람선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들어왔다.

블라디보스톡이 보여준 러시아의 변화상

블라디보스톡의 시가지 모습. 1990년 후반 경제체제의 변화 이후 대부분의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으나, 식품가공산업과 기계산업 덕분에 경제적인 활기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 체제개혁으로 인한 경제침체에서 벗어난 블라디보스톡 시가지에는 고급 상점가와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은 심각한 사회양극화와 빈곤층 확대 등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블라디보스톡의 시가지 모습. 1990년 후반 경제체제의 변화 이후 대부분의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으나, 식품가공산업과 기계산업 덕분에 경제적인 활기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 체제개혁으로 인한 경제침체에서 벗어난 블라디보스톡 시가지에는 고급 상점가와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은 심각한 사회양극화와 빈곤층 확대 등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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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바라본 항구와 시가지. 블라디보스톡은 경제, 문화, 교역, 기술, 교육의 요지로 성장했다. 군사전략도시로 외국인의 방문이 금지되었던 이곳은 이제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며, 연일 주요한 정치와 경제분야의 국제회의가 열린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항구와 시가지. 블라디보스톡은 경제, 문화, 교역, 기술, 교육의 요지로 성장했다. 군사전략도시로 외국인의 방문이 금지되었던 이곳은 이제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며, 연일 주요한 정치와 경제분야의 국제회의가 열린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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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은 외국인들에게 오랫동안 닫혀 있었으나, 소련 해체 이후 달라진 러시아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1860년에 군사기지로 개척된 블라디보스톡은 이제 러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되었고, 에너지와 교통개발의 요지로서 하루멀다 하고 국제회의가 열린다. 이곳은 이미 2012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개최후보지가 되었으며, 이틀 후에는 1차 태평양 경제회의가 열릴 터였다. '동양을 지배하라'는 뜻의 지명은 이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거둔 승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날 것 같았다. 러시아는 구소련연방 해체 후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으나, 상황은 서서히 호전되어 올해는 해체 이전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회복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매년 6%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석유와 가스 등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은 러시아 경제에 대단한 활력을 불러왔고, 이와 더불어 국제정치에서도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아 가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지난 16년 간 겪어온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한국과 미국의 언론을 통해 들어온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까라는 회의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탓이다. 이런 무엄한 생각이 든 것은 2004년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쓴 장-마리 쇼비에의 글을 읽고 나서다. 그는 '러시아: 소련시절의 향수'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미 이런 변화의 분위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송관계자들이 증언하듯, 소련시절의 영화는 텔레비전에서 시청자들의 환호 속에서 방영되고 있다. 어떤 정치인은 기고문에서 소련연방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우려했지만, 소련시절에 대한 향수는 이미 러시아인들의 지배적 정서가 된 것 같다. 믿을만한 기관에서 행한 여론조사를 보아도 이런 분위기가 사실임이 드러난다.

이미 2001년 조사에서 57%의 러시아인들이 구소련으로의 복귀를 원한다고 답변했다. 2003년 조사에서는 45%가 현재의 자본주의체제보다 소련시절의 사회주의체제가 낫다고 대답했으며, 43%의 응답자가 또 다른 볼셰비키 혁명을 원한다고 답변했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다. 1991년 8월 민주혁명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사유제의 도입을 부정적으로 보는 (범죄적 사유화) 사람들이 80%를 넘어섰다."

"70%가  과거를 그리워해요"

방문자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는 주택가 아이들의 모습. 과거처럼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던 주택, 교육, 의료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게 된 러시아 국민들 가운데 다수가 사회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방문자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는 주택가 아이들의 모습. 과거처럼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던 주택, 교육, 의료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게 된 러시아 국민들 가운데 다수가 사회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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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시절에 주역을 맡던 세대는 이제 다수 노령층으로 편입했다. 정부 연금만으로 생활이 가능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소비에트 시절에 주역을 맡던 세대는 이제 다수 노령층으로 편입했다. 정부 연금만으로 생활이 가능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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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부인(67)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과거의 소련이 좋다"고 답변했다. 러시아 경제의 자유화로 인해 30% 정도가 이득을 입었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크게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유를 조목 조목 설명했다.

구 소련시절에는 주택이 무상으로 제공되었고, 의료서비스와 교육도 모두 무료였다. 그리고 1년에 한 달 간의 휴가를 받았고, 2년 한 번씩 항공권 등 여행경비를 지원해 주어 러시아에서 원하는 곳은 어디든 여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제공되던 무상서비스는 모두 유료화되거나 폐지되었다. 

오랫동안 공직에 몸담았던 노인(73) 역시 "구소련 시절보다 월급이 반으로 줄었다"고 말하며 "소련시절이 더 행복했다"고 말했다. 소련시절에는 열심히 일하고 은퇴 후에는 연금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었으나, 이제 노인들은 자식들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하지만 러시아가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철학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남자는 "한 달에 100만원쯤 받는 자신의 월급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많은 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는 이보다 더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경제체제의 변화 이후 강의 내용에 변화가 생겼냐고 묻자 그는 "학생들은 자유롭게 수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과거와 다름없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친다"고 대답했다.

러시아 경제의 자유화는 심각한 양극화를 불러왔다. 사회주의 시절에 비해 빈곤층이 늘고 빈부격차도 커졌다. 1990년대 자본주의에 갖던 막연한 환상을 가졌던 러시아 국민들은 국가가 제공하던 사회적 안전망의 상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는 과거에 대한 강력한 향수로 표출되고 있다.

지난 해 레바다(Levada)연구소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세기 소련/러시아 최고 지도자'를 묻는 물음에 '레닌'이라는 답변이 1위를 차지했다. 2위와 3위도 모두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와 같은 공산당지도자들이었다. 심지어 고르바초프와 옐친 등 자유주의경제개혁을 단행한 지도자들이 4위를 차지한 스탈린보다 인기 없는 지도자들로 조사되었다.

"오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다. 낙후된 경제와 정치, 전제적 통치의 상징으로 정치패러디의 단골 역을 맡았던 그다. 그러나 최근 브레즈네프는 많은 러시아인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보장된 연금과 무상 교육과 의료제도를 잃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한다."

지난 해 브레즈네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즈>는 12월 9일자 신문에서 위와 같이 썼다. 그리고는 러시아의 언론을 인용해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오늘날 '친애하는 레오니드 일니치'가 부활해서 대선후보로 나온다면 어떤 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모스크바행 기차가 석양을 받으며 역을 출발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모스크바행 기차가 석양을 받으며 역을 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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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정교회의 모습. 러시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교회의 숫자도 크게 늘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독실한 신자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정교회의 모습. 러시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교회의 숫자도 크게 늘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독실한 신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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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진행되는 재국영화

러시아 국민들의 좌절은 단순히 과거의 향수에 머물지 않는다. 국민들의 이러한 정서가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고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에너지 분야를 비롯한 러시아의 주요 산업분야를 다시 국유화하고 있다.

지난 해 레바다 센터와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세계여론'이  공동으로 행한 조사결과 85%의 국민이  푸틴의 이런 재국유화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현재 민영화된 다른 산업분야도 국영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5%에 달했다. 반대의견을 표한 사람은 23%에 지나지 않았다. 

안드레이 란코프는 9월 14일 자신의 칼럼에서  러시아 국민들이 새로운 체제에서 느낀 불만이 민족주의와 적대적 반미주의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회주의 시절에도 러시아 내에 현재와 같은 반미주의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 국민은 미국을 가장 적대적인 나라로 생각하는 반면, 중국을 가장 우호적인 국가로 간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의 이런 태도는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해 5월 레바다/세계여론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미국식 자유주의 경제와 중국식 중앙통제 경제 가운데 어떤 모델이 러시아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때 '중국식 중앙통제 경제'를 택한 사람이 44%로, 33%의 '미국식 자유주의'를 넘어섰다. 

러시아가 어떤 미래를 앞두고 있는지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국민들이 지금과 다른 미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겪을 변화와 무관하게, 현재 국민 다수가 겪는 어려움이 해소될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어려움과는 무관하게 러시아 전체의 경제규모와 국민총생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대외적 영향력도 커질 것이다. 

"러시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바보고, 또 하나는 길이다."

"체제가 바뀌어도 도로는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차가 갑자기 흔들리자 러시아 안내자는 이렇게 익살을 떨었다. 나는 웃음으로 답했지만, 러시아는 도로포장보다 훨씬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차창으로 지나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 한 켠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나라 걱정할 처지나 되나..."

식당에 걸린 마르크스의 초상화. 새로운 체제에 대한 불만은 소비에트 시절의 향수와 민족주의 및 반미주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식당에 걸린 마르크스의 초상화. 새로운 체제에 대한 불만은 소비에트 시절의 향수와 민족주의 및 반미주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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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역사에서 바다 위의 석양을 바라보는 주민들.
 블라디보스톡 역사에서 바다 위의 석양을 바라보는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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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피스보트, #블라디보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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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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