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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의 예술작품이 이 세상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 위해서는 두 다리가 있어야 한다. 작가라는 다리와 감상자라는 다리. 그 중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히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제대로 보고 즐길 줄 하는 감상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술사를 살펴보면, 당대에는 거의 알아주는 이 없이 외면을 당하다가 후대에 가서야 그 진가가 재발견되거나 재평가된 바흐의 음악이나 고흐의 그림과 같은 예들을 숱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의 예술작품은, 작가와 감상자라는 두 다리가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만나서 조화롭게 기능할 때, 비로소 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게 되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불멸성을 얻게 되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기리는 말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진부한 격언도, 사실 작가의 죽음 뒤에도 결코 죽지 않는 감상자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그 작품을 창조한 위대한 작가와 더불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보고 즐길 줄 아는 뛰어난 감상자도 함께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안목을 갖춘 감상자는 그리 많지 않아서, 예술작품의 운명은 유행을 따르는 대중의 변덕에 따라 자주 좌우된다. 또한 심미적인 가치보다 경제적인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어 무분별한 투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즘 국내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중섭∙박수근 가짜 그림 사건은 이러한 낯뜨거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 매우 안타깝다.

 

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 그림들도 참으로 좋은 것들이 많은데, 바다를 건너온 유명한 외국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회에만 인파가 몰리는 모습도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그려오고 눈에 익혀온 그림들이 하나같이 서양화 일색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부터도, 우리나라 옛 그림이라고 하면 비현실적인 무릉도원이나 산천의 모습을 비슷비슷하게 그린 구태의연한 산수화가 전부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을 읽고 나서야 나는 그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 옛 그림들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보고 느낄 줄 아는 내 지식과 안목이 부족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의 옛 그림들이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은 뛰어난 화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보고 즐길 줄 아는 감상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2.

 

나처럼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나 미술 교과서에서 흘깃 본 그림 몇 점이 우리나라 옛 그림의 전부인 양 여기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은 발견의 책이며 또한 눈뜸의 책이 될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조선 말엽인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회화사에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화가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그림들의 아름다움을 한 권의 책에 일목요연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상으로 1600년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방대할 뿐만 아니라 거명하고 있는 화가들의 수도 140여 명이나 되며, 공들여 인쇄한 원색도판 그림들도 250여 점이나 수록되어 있는 등 가히 ‘우리나라 옛 그림 백과사전’, 아니 ‘우리나라 옛 그림 전문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나라 옛 그림들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해 놓은 미술관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루어지는 우리 옛 그림 미술관 산책은 함께 동행하고 있는 뛰어난 길잡이 덕택에 몹시도 즐거운 일이 된다. 도무지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막힘이 없는 그의 지식은 분명 학자의 것이련만, 그가 이 책에서 들려주고 있는 그림 해설은 현학적인 용어를 최대한 피한 평이한 말이어서 아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의 지은이 이동주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한국의 전통미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술사가의 입장보다는 어릴 때부터 한국의 옛 그림들을 몹시도 사랑해온 평범한 감상자의 입장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홍준 교수가 쓴 글에 보면, 실제로 그는 학교에서 미술사를 배운 적도, 어느 누구에게도 지도를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틈만 나면 한국의 전통회화들을 보러 다니는 걸 즐기고 관련 책들을 찾아 읽은 것이 전부라고 한다.

 

사실, 그의 직업은 UN총회 한국대표, 국토통일원 장관 등을 지낸 정치학자였지 한국미술사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한 미술사가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미술사학을 한 단계 끌어올린 안목 높은 원로학자로 평가 받고 있으며, 이 책을 비롯해서 그가 저술한 몇 권의 한국 미술사 관련 책들이 전문적으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전공이나 직업이 아닌 분야에서 그 분야의 전문가나 직업인을 능가하는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옛 그림들에 대해서 다만 배우고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학자가 아니라 보고 즐기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는 감상자의 입장에 평생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홍준 교수도 이동주의 미론(美論)을 다루는 글에서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한 공자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즐기는 감상자의 입장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품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이 경우 시대적 양식이니 기법이니 작가의 생애니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의 아름다움은 작품 그 자체에 있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의 올바른 감상은 바로 그림의 아름다움을 결정한 작품의 그 무엇을 알아내고, 그 무엇에 감동하는 데 있다. 감상의 결론은 결국 작품에 있으며, 개개의 작품의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것이 그 으뜸이며 그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9쪽, 머리말)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같은 작가를 두고도 그림에 따라서 좋고 나쁨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을 평하는 자리에서, 겸재의 조그만 그림(片畵)들은 싱겁거나 거칠고 간단한 게 많아서 수작들은 많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시(詩)∙서(書)∙화(畵)의 삼위일체를 중시하는 문인화의 전통에서 보자면, 완당의 그 숱한 난초 그림들도 그 옆에 쓴 글씨와 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라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학계에서 이미 공인된 명성 때문에 대작이든 소품이든 작품 전체가 모두 걸작들로 간주되고 있는 이런 대가들의 작품까지도 이렇게 따질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입장이 학자가 아니라 감상자의 입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의 곳곳에서, 남의 평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이 실제로 보고 느낀 바를 말하고, 실제로 보지 못한 작품이라면 학계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작품 감상을 위주로 해서 우리나라의 그림 역사를 훑어보고 있는 이 책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은 1989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슬라이드 공개강좌의 내용을 일부 수정∙보충하여 펴낸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스크린에 슬라이드로 옛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설명하고 있는 지은이의 목소리가, 마치 미술관 전시실에서 듣게 되는 그림 길잡이의 친절한 설명처럼 우리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그렇다고 작품을 만든 작가의 삶이나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시대적 흐름이나 풍조 등 작품 외적인 문제들을 그가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시대적 흐름이나 풍조가 작품에 미친 영향뿐만 아니라 한∙중∙일 삼국을 함께 묶기도 하고 구분하기도 하는 ‘문화권’이나 ‘중심과 주변’과 같은 공간적인 개념, ‘필묵’, ‘채색’, ‘준법’과 같은 동양화의 기법, 더 나아가 작품의 공급과 수요라는 경제적 측면까지도 꼼꼼하게 고려하고 있다. 다만 이 모든 고려가 수렴해서 나타나는 곳이 바로 작품이며, 따라서 좋은 작품을 판별하고 감상하고 즐기는 우리의 시선은 작품에 모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인 것이다.

 

작가는 어느 시대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어느 사회, 어느 시대의 풍조∙흐름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위대한 작가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 살면서 그 시대의 풍을 따르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넘어가는 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걸작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걸작은 많지 않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림을 즐기고 그림의 아름다움을 논한다고 한다는 것은 그런 걸작을, 좋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334쪽, 결론)

 

3.

 

이러한 감상자로서의 그의 뛰어난 감식안과 깊은 안목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진대, 그것을 우리는 다만 그가 남긴 한 권의 책을 통하여 너무나도 손쉽게 만나고 배우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쉽게 배운 것들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고, 책에서 배운 것들은 가슴으로까지는 내려오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머무르기 쉬운 법. 그러니 가을이 좀더 깊어지기 전에 이 책을 손에 들고서 우리나라 옛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을 찾아가서 실제로 그 작품들 앞에서 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이 책의 지은이가 들려주고 있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아름다움을 그 작품 속에서 찾아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작품의 작가와 나란히 발을 맞출 수 있는 감상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상자들이 점차 늘어나게 될 때, 우리의 옛 그림들은 비로소 어두컴컴한 박물관 수장고에서 걸어 나와 밝은 이 세상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되리라.

덧붙이는 글 |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ㅇ 이동주 지음
ㅇ ㈜시공사∙시공아트 펴냄
ㅇ 2006년 2월 10일 초판 11쇄
ㅇ 값 22,000원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지음, 시공사(1996)


태그:#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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