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루체른(Luzern)은 스위스에서 첫 번째를 다툴 정도로 아름다운 산과 호수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루체른의 풍광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빛이 시리도록 푸른 피어발트슈퇴터 호수(vierwaldstattersee)다. 루체른 호수라고도 불리는 이 호수가 오랜 세월 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면서 루체른을 풍요롭게 하고 있고 있으며, 루체른이 아름다운 것은 웅장한 알프스 산 아래 이토록 아름다운 빙하호수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루체른에 아름다움을 떨구고 간 빙하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루체른 시내에 있다. 이 빙하공원(Gletscher garten)은 루체른 구시가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곳의 입장료가 만만치 않아 근처의 ‘빈사의 사자상’까지만 보고 돌아가는 여행자들이 많지만, 나는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빙하공원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공원’에 간다고 해서 이곳 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딸아이도 빙하공원의 기괴한 빙하 지형을 보더니 앞장서서 공원으로 들어갔다.

 

이 빙하공원의 빙하유적은 1872년 한 농부가 와인 저장고를 짓다가 우연히 발굴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스위스의 국립자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리학 교과서 같이 자연의 신비를 잘 알 수 있는 이 자연 지형은 대형 천막 아래에서 바람과 비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 이 빙하 지형이 공원으로 관리된 이후 무려 1100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하니, 이제 이 빙하공원은 루체른의 관광명소가 된 듯하다.

 

이 빙하공원에는 놀랍게도 1~2만년 전 빙하기의 흔적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루체른을 포함하는 알프스 서북쪽 평원은 온통 빙하로 뒤덮여 있었다. 빙하기가 끝나 가면서 빙하들이 서서히 녹았고, 이 물이 아래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빙하 녹은 물이 늘어나면서 그 흐름은 급류를 이루었다.

 

루체른에 빙하가 흐르던 당시의 흔적들이 눈 아래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의 딸이 가장 흥미롭게 살펴보던 곳은 깊이가 9m나 되는 포트홀(pot hole)이다. 루체른 지방의 빙하 녹은 물이 급류를 이루어 세차게 흐를 때에 암반의 오목한 곳을 만났고, 그곳에서 소용돌이가 생기는데, 그 당시에 남은 흔적이 포트홀이다.

 

이 소용돌이로 바위에 구멍이 생기면, 그 구멍으로 들어간 돌이 다시 소용돌이에 의해 회전하면서 암반을 계속 깎아냈다. 그 결과로 암반 아래에 9m 안팎의 움푹 파인 구덩이가 생긴 것이다. 이 구덩이를 포트홀이라고 하는데, 스위스 사람들은 거대한 힘이 남긴 이 소용돌이 모양의 구멍을 ‘거인의 냄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빙하공원에는 전형적인 모습의 포트홀들이 잘 남아 있다. 이동하는 빙하에 딸려온 동그란 돌덩이, 표석이 빙하공원의 포트홀 속에 마치 만들어놓은 것 같이 잘 남아 있다. 포트홀 주변에는 함께 딸려온 큰 바위들과 함께 그 바위들이 암반의 바닥을 그은 흔적들도 남아 있다.

 

빙하가 모두 녹고 급류도 사라진 뒤 남은 것은 바로 저 포트홀 속의 돌멩이뿐이었다. 구덩이 속 반질반질한 돌덩이는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저 동그란 돌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암반을 둥글고 깊게 파고들었을까? 자그마한 돌과 물이 거대한 암반을 침식시켰을 당시의 모습과 힘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지금은 단순히 빙하지형으로 남았지만, 당시에 이 포트홀의 돌이 굉음과 함께 물 속에서 구르던 모습은 경이로웠을 것이다.

 

나는 빙하지형 뒤편에 지어진 빙하박물관에 들어가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루체른 인근에서 발견된 특이한 모습의 화석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화석은 이 빙하공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뭇잎 화석이었다. 땅 속에 묻혀 화석이 된 이 나뭇잎은 바로 야자수 잎 화석이었다.

 

 

한 점의 작은 화석은 숨김없이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2천만 년 전에는 스위스가 아열대 기후 속에 있었고, 루체른 지역은 야자수가 우거진 해변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 눈 앞에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조개들이 무더기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커다란 화석이 떠억 버티고 서 있으니 황당하기까지 하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알프스 기슭의 산과 호수가 과거에는 바닷가였다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이 아열대 시기에서도 한참 뒤에 모습을 보인 스위스 인들의 역사는 기나긴 지구 역사에서 보면 찰나라는 생각이 든다.

 

루체른 주변 빙하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 건물로 들어섰다.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신비한 빙하지형이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고, 눈앞에서는 지형학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2만 년 전 지구 대빙하기의 다양한 빙하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알프스에서 만들어진 빙하가 녹으면서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미니어처 모형들에 너무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직 내 마음에 동심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나의 관심분야가 이해하기 쉽도록 잘 설명되어 있는 흐뭇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빙하의 기원과 형태를 보여주는 전시실에는 눈의 결정체에서부터 눈이 녹아 얼음이 되고 빙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고 있다. 가장 중점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이야기는 빙하기에 스위스 전체가 빙하 아래에 묻혀 있었던 흔적들이다. 빙하가 이동하면서 암석 표면에 가느다랗고 너울지는 홈 모양의 자국을 남긴 찰흔(擦痕), 그리고 빙하 박물관 밖에 전시되어 있는 포트홀의 생성과정이 그림과 모형으로 잘 설명되어 있어서 시각적으로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박물관 중앙에 온통 갈색 털로 뒤덮인 매머드(mammoth) 인형이 귀엽게 서 있었다. 매머드 인형의 등 위를 보니, 사람이 올라탈 수 있는 안장이 올려져 있었다. 귀중한 화석과 모형들을 만져볼 수 없는 어린이들이 박물관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박물관 측의 세심한 배려였다. 나는 딸을 번쩍 들어서 매머드 인형 위에 올려 주었고, 딸은 매머드의 등자에 조심스럽게 발을 끼웠다. 딸은 망아지 크기 정도로 축소된 매머드 위에서 매머드 인형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 어린 아가씨는 앞으로 박물관의 인상 깊은 인형을 떠올리면서 매머드를 기억할 것이다.

 

이 매머드 인형 뒤편에는 수만 년 전, 지각변동을 거친 루체른과 서북쪽 평원의 알프스가 빙하로 덮인 채 당시의 화석들과 함께 전시 중이었고, 그 중에 진짜 매머드의 화석이 있었다. 빙하시대에 적응한 털복숭이 매머드는 당시 생태계의 최강자였다. 이 매머드가 알프스의 빙하를 건너 이동하는 그림 앞에서, 매머드의 나선형으로 휘어진 상아 뼈 일부가 전시 중이었다.

 

 

당시 루체른 인근을 털이 무성하게 덮인 코끼리들이 활보하고 있었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지구의 변화가 신비스럽지 아니한가! 나의 지식은 기나긴 지구 역사에서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을 차지하는 인류의 삶 일부분에만 국한된 것이며, 나의 알프스에 대한 지식은 우주의 역사 안에서 참으로 미천한 것일 것이다.

 

박물관 안쪽에는 빙하 디오라마관(Glacier-Diorama)이 있었다. 나의 가족은 다리도 쉬어갈 겸 자그마한 영상 상영관의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꽤 걸었기 때문에 지친 다리를 쉬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가 의자에 앉자 다른 여행자들도 우리 옆에 와서 앉았다.

 

그 여행자들 중에는 내 딸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온 한국인 가족도 있었다. 우리는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는 내 귀에 이 가족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빙하 지형을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들렸다. 그 가족의 어머니는 각 화석을 보면서 전문가적인 지질학 지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한국에서의 직업이 선생님이거나 교수일 거라고 생각했고, 저런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고 있는 남자 아이가 참 훌륭하게 클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10분쯤 뒤에 영어로 설명되는 빙하시대 영상 프로그램이 이 디오라마관에서 상영되었다. 주위 배경으로는 루체른 인근의 필라투스 산과 리기 산이 온통 얼음에 덮인 알프스 실경으로 그려져 있고, 산 아래로 빙하가 흐르며 매머드들이 활보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배경 그림 앞으로 입체의 소형모형이 빙하시대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배경 그림과 모형 위로 특수조명이 무대를 비추면서, 신비한 빙하시대 슬라이드 쇼가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박물관에 비해 박물관 전시기술이 굳이 앞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설명이 짜임새 있고 단순 명료했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나는 마치 미래의 우주 속으로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 지구의 간빙기라고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지구 위에 다시 빙하기가 덮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빙하기의 모습은 이 빙하공원에 남은 빙하의 흔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빙하기에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인가? 빙하기에 살게 될 사람들은 과거의 따뜻한 시대에 살았던 우리 인간들의 화석을 더듬을 것인가? 아니면, 지구 온난화로 지구의 빙하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인가?

 

루체른의 과거는 명확한 화석으로 남아 잘 이해될 수 있지만, 미래의 모습은 알 수가 없다. 다만 과거 지구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나는 디오라마관의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내가 아는 게 참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 루체른의 역사와 자연을 더 둘러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루체른, #빙하공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