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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간다. 황금벌판이 서서히 비워간다. 우리집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마니산 자락의 색깔도 바뀌고 있다. 울긋불긋 수줍은 새색시 얼굴처럼 나뭇잎에 자기만의 빛깔로 색이 칠해지고 있는 것이다.

상강(霜降)을 지나면서 풀 자라는 것도 멈추었다. 녹색의 기운이 바래지고, 장마철 무성하게 자라던 기세가 꺾였다. 꽃이 진 자리에는 씨가 똑똑 여물었다. 자손을 퍼트리는 자연의 섭리가 잡초에도 있다. 이듬해 새 생명을 기약하듯이.

밭둑에 어린아이 키만큼 자란 풀도 찬바람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가을의 끝자락이 보인다.

저기 감나무에 호박이 달렸어!

풀이 말라가자 그동안 밭둑 풀숲에 감춰진 호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풀숲뿐만 아니라, 고구마밭까지도 줄기가 뻗어 튼실한 열매들이 누렇게 익어 앉아 있다.

큰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는데 이런 큰 기쁨을 주다니! 우거진 풀숲에서 잡초에 지지 않으려 얼마나 많을 애를 썼을까? 꽃이 피고 수정이 되고, 그리고 탐스런 열매를 맺기까지 제 할일을 다한 자연의 지혜가 놀랍다.

놀라운 일이 또 있다. 아내의 호들갑이 유별나다.

감나무에 호박이 달렸다. 어떻게 가지를 타고 올라갔을까?
 감나무에 호박이 달렸다. 어떻게 가지를 타고 올라갔을까?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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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저기 감나무 좀 봐요!"
"감나무는 왜?"
"저거 안 보여?"
"어! 호박 아냐!"


누런 호박이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참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호박덩굴이 나뭇가지를 타고 저 높은 데까지 올라갔을까? 단풍 색깔의 감잎, 빨갛게 익은 감, 그리고 누런 호박이 아침햇살과 함께 잘 어울린다.

무거운 몸뚱이를 떨어트리지 않은 게 참 신기한다. 그동안 숱한 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어냈을까?

"여보, 저 호박 어떻게 따야 하죠?"
"글쎄! 그냥 놔두지 뭐."
"놔두기는요! 애써 열매 맺힌 것을 썩히면 안 되죠."
"그럼, 올라가서 따볼까."


사실, 감나무에 올라가 따는 것도 만만찮은 일일 것 같다. 늙은 감나무라 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아무튼 아내는 서리가 내릴 때까지 놔두어보자고 한다.

호박은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요긴한 먹을거리

"여보, 오늘 딴 늙은 호박이 몇 개예요?"
"한 열 개는 되겠는 걸."


풀숲에서 호박이 자라고 있다. 제 몫을 다한 호박이 탐스럽다.
 풀숲에서 호박이 자라고 있다. 제 몫을 다한 호박이 탐스럽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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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저기 풀숲을 헤치고 보니 생각보단 수월찮게 눈에 띈다. 단호박도 두 개가 보인다. 풋풋한 애호박도 땄다. 아내가 리어카를 가져왔다. 리어카에 가득 실린 호박이 풍성하다.

우리는 따스한 봄날, 밭둑 아래에다 구덩이를 파고 호박씨를 넣었다. 호박구덩이에 잘 썩은 두엄을 한 삽 깔았다. 그리고 별로 손본 게 없다. 저절로 자랐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씨를 넣은 뒤 한 열흘이 지나 싹이 텄다. 튼실한 떡잎이 고개를 내밀며 씨껍질을 떨쳐내는 모습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다. 어린 싹이 시나브로 자라다 첫 꽃이 피고, 그때부터 자라는 데 속도가 붙었다.

누가 못 생긴 꽃을 호박꽃에 비유했는가? 호박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깔부터 화사하고 참 아름답다. 초록 잎사귀에 노랗게 피어 있는 모습 또한 소박하다. 여기에 벌이 날아다니며 수정을 하면 초록색의 작은 호박이 점점 커진다.

그런데, 장마철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뒤로는 호박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다. 풀이 호박덩굴과 엉겨서 자라 애호박이 잘 띄지 않아서다.

가끔 눈에 띈 애호박은 정말 요긴한 먹을거리였다. 둥근 전을 부치기도 하고, 채 썰어 풋고추, 부추를 넣어 만든 부침개는 막걸리 안주거리로 최고였다. 새우젓을 넣어 볶음을 해먹으면 사각사각 씹히면서 부드러운 맛을 느끼게 하였다.

또 호박잎은 쌈을 싸서 먹으면 색다른 맛을 냈다.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로 호박만한 채소도 드물 것이다.

늙은 호박, 맛도 영양도 만점

잘 익은 호박. 맛도 영양도 만점이라 하여 '가을보약'이라고 부른다.
 잘 익은 호박. 맛도 영양도 만점이라 하여 '가을보약'이라고 부른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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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늦가을에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늙은 호박이 탐스럽다. 누런 빛깔이 가을을 닮았다. 아마 속을 가르면 샛노란 속살에서 단내를 풍기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덩치가 큰 놈, 작은 놈 각기 크기가 다르다. 둥근 호박 얼굴에 가을의 깊이만큼 주름이 깊게 패여 있다. 따스한 햇살을 받아 늙은 호박이 단맛을 품어 안았을 게 틀림없다.

아내가 마른 행주로 호박의 겉을 깨끗이 닦아낸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여보, 호박으로 뭐해 먹을까?"
"죽도 쑤고, 떡도 하죠. 작년에도 실컷 먹었잖아요."
"요번 주말엔 호박밥 해줄 수 있지?"
"그거야 너무 쉽지요."


나박나박 썬 호박을 밥할 때 안치면 호박밥이 된다. 여기에 양념장을 하여 비며 먹으면 달짝지근한 맛의 색다른 음식이 된다.

호박은 잘 익은 것일수록 단맛이 많이 난다. 늙은 호박의 당분은 소화흡수가 잘되어 위장이 약한 사람이나 회복기 환자에게 유익하다고 한다. 또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여 고혈압과 당뇨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중풍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뇨작용을 하여 출산한 여성의 부기를 빼는 데도 효과가 있어 산모에게는 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늙은 호박을 '가을보약'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 거둔 것을 다락에 차곡차곡 쌓았다. 우리가 거둔 늙은 호박은 참 요긴한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호박전, 호박죽, 호박범벅, 호박떡까지. 별미를 즐길 생각에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올 겨울은 입이 심심하지 않을 듯싶다. 호박을 거둬들이고 가슴이 왜 이렇게 뿌듯할까?

우리가 거둔 호박이다. 올 겨울 요긴하게 죽도 쑤고, 떡도 해먹을 참이다.
 우리가 거둔 호박이다. 올 겨울 요긴하게 죽도 쑤고, 떡도 해먹을 참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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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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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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