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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골목 안에 있는 유서 깊은 박물관이다.
▲ 루체른 피카소 박물관. 작은 골목 안에 있는 유서 깊은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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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스위스 여행에서 잠시 들렀던 루체른(Luzern)은 나에게 너무나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겨울날 호수 주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중세의 루체른을 떠날 수밖에 없음이 아쉬웠었다.

겨울의 루체른은 맑고 투명한 호수만큼이나 아름다운 도시였었다. 나는 언제 다시 이 루체른에 오게 될지 막연했지만, 마음속으로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는 루체른 구시가의 예쁜 골목길을 딸과 함께 걷고 있었고, 골목길 사이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가게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구시가 중심의 구 시청 광장에서 각자 보고 싶은 곳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구 시청 광장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 퓨렌가세(Furrengasse) 거리에서 한 박물관 표지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 박물관은 피카소 박물관(Picasso Museum)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이곳이 루체른의 피카소 박물관이었다. 굳이 이 박물관을 답사할 계획은 없었지만, 루체른의 명소를 눈앞에 두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딸에게 엄마를 불러오라고 했다. 딸의 엄마는 구 시청 광장 반대편 옷가게에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있었다. 아내는 루체른의 옷가게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곳만 집중하여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고 가끔 한 번씩 사고를 치는 아내를 말려야 하기도 했다.

"여보! 여기, 피카소 박물관이 있어. 들어가 보자. 루체른의 옛날 집 구경도 할 수 있을 거야!"

유럽에 산재한 것이 피카소 박물관이지만, 유럽여행이 처음인 아내는 '피카소'라는 말에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나도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박물관 앞까지 갔다가 박물관이 휴관하는 날이라서 발걸음을 돌렸던 적이 있었다.

17세기 초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홀이다.
▲ 암린하우스 홀 17세기 초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홀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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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박물관은 예상보다 상당히 작고 아담했다. 처음 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구 시청 주변에서 약간 길을 헤맬 수도 있을 정도로 박물관이 골목길 안에 숨어 있다. 박물관 입구도 중세 유럽의 가정집을 들어가듯이 작다.

박물관 입구 오른편에는 피카소 박물관이라고 조그맣게 적혀 있다. 이 유명한 박물관을 드러내 놓고 큼지막하게 광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다. 입구 바로 오른편에 자리한 '피카소 박물관' 글씨체는 마치 피카소의 그림처럼 예뻤다.

이 아름답고 유서 깊은 박물관은 르네상스식 석조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세기 초에 이 석조건물을 구입한 월터 암린(Walter Am-Rhyn)의 이름을 따서 암린 하우스(Am Rhyn House)라고 불린다.

당시 그는 1618년에 또 다른 르네상스식 건물을 구입하였는데, 양 건물 사이에 회랑을 만들고 안마당을 리모델링하여 두 건물을 연결하였다. 1946년 루체른 시에서 루체른의 생일을 기념하여 이 건물 전체를 구입하였고, 1977~1978년에 이 건물은 다시 개축되었다.

박물관 1층의 매표소 앞에서 친절한 아주머니가 나의 가족을 맞았다. 그녀는 어떤 언어로 된 작품 설명문을 원하느냐고 묻더니, 우리에게 영어로 된 설명문을 나누어 주었다. 아내가 루체른 구 시가에서 산 기념품을 잠시 맡겨 놓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엽서 판매대 뒤편 빈자리에 우리 짐을 내려놓고 싱긋 웃는다.

피카소와 젊고 아름다운 그의 아내


굵은 선들을 이용하여 형태를 단순화하였다.
▲ 피카소 회화 굵은 선들을 이용하여 형태를 단순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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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 옆 1층에는 이 건물이 완성된 17세기 초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홀이 그때의 구조와 채색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홀 내부는 마치 '포토샵'으로 색상처리를 한 것처럼 노란 채색이 빛나고 있었다.

홀의 노란 색상과 활처럼 굽은 천장, 홀 내에 자리 잡은 붉은 기둥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보존된 그림 같은 작은 집은 어느 박물관의 유물보다도 더 현실감이 있어 보였다.

이 암린 하우스의 2~4층에 피카소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은 박물관이지만, 한 유명작가의 작품과 사진만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우리는 수백 년 전에 지어진 좁은 계단을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실내 바닥이 나무 바닥이어서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 어릴 적 초등학교 교실의 나무 바닥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고, 초등학교 친구들과 책걸상을 치우고 함께 나무 바닥을 청소하던 생각이 났다. 이 박물관의 나무 바닥도 청소하기에 힘들지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해 보았다.

박물관 2층부터 3층에는 로젠가르트(Rosengart) 가문이 루체른 시에 기부한 피카소의 귀중한 작품 50여 점이 전시 중이었다. 이 작품들은 피카소가 살았던 생애 중 마지막 20년 동안의 노년기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피카소의 유화작품, 불투명한 수채물감을 이용한 작품뿐만 아니라 판화작품, 도자기, 철제 조각 작품, 습작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잠시 피카소의 작품에 빠져보았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굵은 선들을 이용하여 형태를 단순화시킨 그림들을 그렸다. 오히려 많지 않고 간략한 선들로 인해, 피카소의 인물화들은 거부감이 들지 않고,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 선들은 인간의 외면 뿐 아니라 인간 내면까지 표현하는 듯 다양해 보였다.

나는 아내, 딸과 함께 박물관 4층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사진작가 데이빗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 찍은 말년의 피카소 사진 200여 점이 전시 중이었다. 사진 전시관 입구에는 저작권이 있는 이 작품사진들을 사진 찍지 말라는 경고문도 붙어 있었다. 사진을 사진 찍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나는 박물관의 다양한 피카소 그림에 비해, 노년의 피카소를 찍은 이 인상적인 사진들이 더 흥미로웠다.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사진 속에는 항상 그와 함께 일상생활을 하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나와 있다. 그의 아내가 피카소를 완벽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카소를 마주하는 아내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아내를 바라보는 피카소의 표정도 행복함에 젖어있다.

피카소는 여인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많다.
▲ 피카소의 여인 피카소는 여인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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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보면서, 박물관의 2층과 3층에 숱하게 그려진 여인들의 나체 그림이 떠올랐다. 그 나체는 음모까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아주 자극적이었다. 피카소가 노년에 그린 여인의 나체들이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하였다면, 그는 아내의 나체를 즐겨 그린 특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인의 나체라고 생각하였던 피카소가 말년에는 아내의 나체에 몰입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진 속 그는 자신의 작품에 몰입하면서 행복해하고 있었다. 눈만 찍힌 그의 사진에서는 예술가다운 광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집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잘 정제된 작품만을 엄선한 사진작가의 사진이기는 해도, 그를 찍은 사진에서는 그의 인간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 피카소의 눈빛을 봐! 피카소만의 '느낌'이 느껴져. 나이가 들어서도 형형한 눈빛을 좀 봐! 눈빛이 살아 있잖아."

나는 아내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은 너무도 조용했다. 가끔 관람객이 계단을 올라오면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 나의 가족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관람객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피카소의 그림과 사진을 온전히 만끽했다. 나는 나무 바닥을 조용히 걸었다. 작은 박물관의 전시실이 끊어지는 듯 계속 연결되고 있었다.

나는 방명록에 나의 가족이 이 박물관을 다녀가는 소감을 남겼다. 나는 가족과 함께 박물관을 나서면서 박물관 직원 아주머니에게 참 좋은 박물관을 구경하고 간다고 인사하였다. 그녀는 우리를 보고 다시 오라며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말 여행의 기록입니다.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루체른, #피카소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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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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