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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것들은
스스로를 벗어난다
하루를 버린 해가 서산을 넘듯
철새는 날아간다
인륜을 버리고 천정의 길을 간 허균처럼
철새는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
제 속의 것을 억누르지 못해
아비를 버리고
둥지를 버리고
꽉 막힌 하늘과 지상
그 가운데를 긴 칼로 내리 그은
수평선, 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철새는 몸을 던진다
볏단들이 줄줄이 묶여 쓰러지는 동안
오래된 길을 버린 날 짐승들,
마침내 신성의 하늘을 난다.
<낯선 길> -'홍일표'
 
 가을의 하늘을 우러러 보면 일렬종대로 줄지어 아름답게 날아가는 새들의 길과 마주친다. 그들의 길은 하늘의 길이다. 그들의 자연의 길을 생각하다보면 길 안의 길이란 또 얼마나 지루한 반복인지… 또 길에서 멀리 떨어진 길은 또 얼마나 외로운지…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넘치는 것들은 스스로를 벗어난' 길이 되어 저 홀로 멀어진다.
 
바다가, 강물이, 눈물이 넘치는 길의 이정표는 어디에도 없다. 시인은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신성의 하늘을 나는 새의 길을 형상화 하고 있다.
 
'볏단들이 줄줄이 묶여 쓰러지는 동안 오래된 길을 버린 날 짐승들 마침내 신성의 하늘을 난다'고, 이 새의 길은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는 전생의 길 하나를 가리킨다. 
 
새의 길의 이정표는 태양과 별과 달이다. 이 길은 자연에서 시작하고 자연으로 돌아 가는 신성의 길이다. 인간의 신성의 길은 사실 내 안에 있는지 모른다. 내 안에서 끓어 넘치고, 내 안에서 몸부림치고, 내 안에서 주저 앉는 길 그리고 우뚝 일어서는 길 …'내 안에 내가 신전을 세우는 길 말이다.
 
시인이 말하는 아비를 버리고 둥지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는 길은, 자연회귀의 길이다.
여기서 '꽉 막힌 하늘과 지상 그 가운데를 긴 칼로 내리 그은 수평선, 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철새는 몸을 던진다'고 아주 낯설게 표현한다. 이 낯선 표현의 길을 만나기 위해 시인은 숱한 시의 길을 버린다.
 
지구의 반복되는 길은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죄 때문은 아닐까.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지구의 길에서 어떤 길이든 자신이 정한 출발점에서 다시 돌아와야 시작한다.
 
 
 어떤 꿈이든 초발심으로 돌아와야 새롭게 시작한다. 시작부터 수없이 엉클리고 꼬이는 운명의 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길을 향해 간다. 그러나 길은 주인이지만 나그네의 것이다. 나그네가 그 길의 방향을 잡아서 걸어갈 뿐이다. 인생이란 길은 시인이 이야기하는 <낯선길>과 다름없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 날마다 아침이면 우리에게 문을 노크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이 아닌 곳에 접어들어 있다. '이 길이 아닌데, 이 길로 가면 안되는데,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데' 하면서 반복된 낡은 길을 가고 있다. 한길만 고집하며 걸어가는 길이란, 많은 길을 그리워하는, 한길에 대한 후회의 길로 남을지도 모른다.
 
홍 시인은 수 없이 길을 만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낯설게 안내한다. 벼의 짚단들이 하나 둘 쓰러져 누운 가을 벌판을 가로 질러 저 수평선의 꽉 다문 입술 속으로 사라지는 철새들의 길은, 내세의 멀고 먼 여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새들은 유빙의 한계선을 향해 나침판도 없이 그들의 날개털 하나 하나, 고정밀의 디지털 안테나가 되어 정확하게 출발점에 돌아온다고 한다. 단 한 마리의 낙오병이 없는 귀향을 꿈꾸는 그들의 날갯짓이 파란 가을 하늘을 오래도록 우러러 보게 한다.

태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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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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