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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에 이어서)
지리산 수련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랫목에 눕자 땀을 흘리며 주무셨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 할 때는 보통 때보다 기력이 많이 빠져 나가는 법이다. 격렬한 감정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성한 사람도 진이 빠져 버리는데 몸도 성치 못하고, 늙으신 어머니가 몇 시간을 짜증내고 불신하고 증오하는 삶을 살았으니 소금에 절인 파김치가 되어 누우신 것은 당연하다.

평온함은 채 하루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뜬금없는 주장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리산 수련장의 청암선사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머니를 진맥하고 나가시자 어머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사님의 진맥
▲ 진맥 선사님의 진맥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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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사람이 아이고 둔갑장이 귀신이다. 밥 해 주는 아주머니가 세 번째 딸인데 지하에서만 산다. 3년째 숨어 살고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고 햇볕을 보면 죽는다고 해서 밖에 나오지도 못한대. 저 재주 좋은 사람이 와 숨어 사는지 몰라.”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듯이 그러냐고 했다. 어머니는 더 깊숙한 비밀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 속에 어머니를 오래 방치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놓고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내가 익힌 대처법이다.

어머니의 이런 증상을 처음 접했을 때 내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서울 형님네 가서 어머니 방에서 같이 자는데 새벽에 일어난 어머니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옥상에 헬리콥터가 와서 타라고 한다면서 어서 옥상에 올라가자고 떼를 쓸 때였다.

보라매공원에서 고향마을 뒷집에 사는 ‘남새들띠기’가 쑥을 뜯는데 어서 안 오고 뭐하냐고 전화가 왔다면서 황소고집으로 현관문을 열고는 신발도 안 신고 밖으로 기어 나가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식구들은 난리가 났다. 한결같이 어머니의 착각을 비웃거나 개탄했다. 어머니의 착각을 고쳐드리기 위해 손짓 발짓을 다했다. 어머니는 좌절했다. 철저히 부정당하는 인생이었다.

식구들이 어머니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건성으로 대하듯이, 어머니도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의심했다. 누군가를 모함하고 비난 할 때는 섬뜩할 때조차 있었다. 형수님이 주는 오줌 안 누는 약을 당신을 말려 죽이기 위한 약인데 안 먹으면 밥도 안 주기 때문에 안 먹을 수가 없다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 손을 잡고 호소했었다.

처음에 나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긴가민가하면서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밥을 안 주겠다는 위협을 하는구나 싶었다. 형수님에 대한 혐의를 푼 것은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지내고 나서다.

언젠가 우리 집에 누님와 매형이 오셨을 때다. 분주하게 마루와 부엌을 오가는데 어머니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 대한 험담이었다.

“약장사 다 굶어 죽을끼다. 찔레꽃 따다 약 만들고, 머구 뿌리 캐다가 약술 담그고, 파리 목숨 불쌍하다고 파리약 못 치게 하는 저기 사람이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지.”

이런 식의 어머니 주장이야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니 그래도 나은 편이다. 듣는 사람이 가려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통해 사실전달이 이루어질 때는 다른 문제다.

“남자 여자 문둥이 떼처럼 우리집에 몰려와서 묵고 자고 하고나면 집에 남아나는 기 있나. 내 돈주머니도 누가 가져갔는지 없어지고 시골집에서 갖다 논 참빗 하나도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인다.”(26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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