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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 가는 길에 건너가는 '이 뭣고' 다리.
 복천암 가는 길에 건너가는 '이 뭣고' 다리.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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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암(福泉庵)은 문장대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한 등산객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뭣고'라는 다리를 만난다.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사뭇 반갑다. 내가 이 다리를 처음 본 것이 아마도 15년쯤 되었으리라.

다리는 그동안 얼마나 성성하게 '이뭣고?'라는 화두를 참구했을까. '이뭣고'라는 화두는 철벽으로 꽉 막힌 삶이라는 일물(一物)에 시원한 구멍을 뚫기 위한 송곳이다. 그러나 난 꽉 막힌 삶에 길들여져 구멍을 뚫지 않아도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두루뭉술하게 세상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화상이 아닌가.

다리에서 복천암까지는 담배 한 대 피울 참이나 걸릴까. 이윽고 복천암 입구에 닿으니 족히 3, 4백 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마치 사천왕 중의 한 분처럼 당당한 체구로 암자 입구를 지키고 섰다. 이 느티나무 천왕은 아마도 복천암의 흥망성쇠를 낱낱이 지켜봤으리라. 담장 너머로 힐끔 복천암을 넘겨다보자 '호서제일선원'이란 현판이 얼른 눈에 들어와 박힌다.

바위 틈에서 샘이 흘러 내려오더라

복천암 전경.
 복천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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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 경내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다. 서기 1686년 늦가을. 조선의 선비 정시한(1625 ~ 1707)은 예순 살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이곳에 왔다. 도착한 첫날을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침식사 뒤 달마암을 출발하여 복천사에 도착했는데 약 4리 정도다. 법당과 샘을 둘러보았는데 샘은 청룡변의 바위 틈에서 흘러내려오고 있어 매우 기이했다. 방에 들어가니 지통˙인관 두 노스님이 맞아주었다. 고적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바로 세조대왕이 신미스님에게 보낸 편지 두 장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장은 종이가 찢어져 글씨가 없으므로 판별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판서 김수온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며 불상 권선문도 있었다. 오랫동안 경건히 감상했다. 스님은 또한 신미 스님의 가사와 선의도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선의는 화안포로 짙은 홍색을 띠고 있다. 신해년(1671)에 도적이 훔쳐가면서 불에 던지고 도망갔으나 타지 않았다고 한다.

지통 스님이 음식을 차려주었다. 하가섭암의 각령 스님은 스물 여덟 살인데 마침 절에 돌아왔기에 함께 얘기를 나눈 다음 그에게 짐을 짊어지게 하고 함께 복천암을 떠났다. 인관 스님이 따라 나왔는데, 동쪽 골짜기에 올라가니 신미와 학조 스님의 부도 2기가 있다. 잠깐 쉬었다가 곧바로 하가섭암으로 갔다. 그 암자는 황폐되어 미처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유숙할 수가 없었다. 잠시 앉아 있노라니 각령이 산과일을 먹으라고 주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 1686년 10월 17일치

정시한이 '복천사'라고 부르는 걸 보면 복천암은 당시에도 암자 규모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그가 봤다는 신미와 학조 스님의 부도는 2004년, 지방 문화재에서 각각 보물 제1416호와 보물 제141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 2기의 부도는 몸돌 중앙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부도의 주인이 누구라는 걸 확실하게 말해준다.

복천선원.
 복천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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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앞을 지키고 있는 주목.
 선원 앞을 지키고 있는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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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이곳에서 지낸 성철 스님의 하안거

복천암 선원은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방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곳이다. 동산 스님, 성철 스님, 고암 스님 등 내노라하는 선승들이 모두 몇 철씩 머물다 갈 정도로 선수행으로 이름난 암자다.

성철 스님 행장기를 보면 1943년에 이곳에서 하안거를 난 것으로 돼 있다. 1936년에 출가했으니 출가한 지 7년째 되던 해에 이곳에 온 것이다. 당시 성철 스님은 얼마나 서슬 푸른 납자였을까.

어느 한 학인이 조주 스님에게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庭前柏樹子)"하고 묻자,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대답했다던가.

선원 뜰 앞에는 상당히 밑동이 굵은 주목 한 그루가 서 있다. 태백산이나 소백산 주목 가운데 가장 큰 나무와 맞먹을 정도로 굵은 나무다. 이곳에서 꽤 오랜 세월을 머무르면서 숱한 선객들을 지켜보았을 산 증인이다.

성철 스님께서 이곳에서 정진하시던 시절에 내가 여기 와서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까닭입니까?"하고 물었다면 아마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뜰 앞의 주목"이라고 답하진 않았을까 싶다.

암자로 들어오는 길에 본 '속리산복천암선원복원기념비'에 따르면 이 복천선원 건물은 1980년에 지은 것이다. 지금 선원 건물은 해제 철을 틈타 수리 공사가 한창이다. 'ㄴ' 자 형으로 된 건물 중 '호서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을 단 가장 좌측 부분들은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각(水閣)과 장독대. 맞배지붕 형태의 수각을 지어 샘을 보호하고 있다.
 수각(水閣)과 장독대. 맞배지붕 형태의 수각을 지어 샘을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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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뒤 극락전으로 가려면 수각(水閣) 앞을 지나야 한다. 300여년 전, 선비 정시한이 기이하다고 했던 그 샘물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바로 수각이다. 복천암이란 암자 이름도 이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세조가 복천암에 머물면서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얘기도 필시 이 샘과 연관이 있을 터.

당시 이곳엔 신미와 학조라는 두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바로 동쪽 기슭에 있는 부도의 주인공들이 그들이다. 두 스님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서 산  아래 있는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나자 세조를 괴롭히던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조는 암자를 중수케 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 옥판까지 하사하였다고 한다.

세조가 병을 고침으로써 복천암이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명성을 듣고 나서 세조가 찾아온 것일까. 혹 맑고 담백한 물맛을 가진 샘을 암자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울 줄 아는 상재(商才)를 가진 스님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극락보전.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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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좌측에 있는 산신각.
 극락보전 좌측에 있는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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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암은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선원과 요사가 있는 남쪽 영역과 나한전과 요사가 있는 북쪽 영역으로. '속리산복천암선원복원기념비'는 극락전과 나한전을 1976년에 복원했다고 적고 있다.  산신각도 극락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산신각 탱화에 적힌 화기(畵記)에 그렇게 적혀 있다.

극락보전은 복천선원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있다. 극락보전은 정말이지 손바닥만한 마당도 없다. 부족한 공간을 축대를 쌓아 넓혀서 건물을 짓다 보니 마당을 둔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 했을 것이다.

극락보전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그런데도 측면에 공포가 있는 걸 보면  원래는 팔작지붕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극락보전 불단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으며 왼쪽엔 대세지보살, 오른쪽엔 관세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산신각 역시 극락보전과 똑같이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함께 걸려있다. 독성탱화는 융희3년(1909년)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독성탱화 앞에는 독성의 모습을 조각한 상이 세워져 있다.

나한전.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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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요사.
 나한전 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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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옆으로 난 문을 나가서 오솔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나한전 영역에 닿는다. 나한전 요사는 본래 선원을 옮길 생각으로 신축한 건물이라 한다. 그러나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예전 선원을 계속 사용하기로 함으로써 그냥 요사로만 쓰이고 있다.

나한전은 요사 뒤에 높게 쌓은 축대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된 건물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했고, 좌우로 8구씩 모두 십육나한을 모셨다. 극락전 영역보다는 이곳이 훨씬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스스로 복을 일구는 복전암(福田庵)이 되기를

입구의 채소밭.
 입구의 채소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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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극락전 영역으로 돌아와 복천암을 나선다. 암자 앞에는 텃밭이 있고 그곳엔 배추와 고추가 심어져 있다. 선승들의 노동은 곧 수행의 일환이다. '백장청규'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이라 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는 뜻이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정진규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일부  

올해는 정말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울 만큼 비 내리는 날이 많은 해였다. 놀고 있는 햇볕도 아깝거늘, 하물며 놀고 있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선가의 오랜 가풍인 선농일치가 이곳에서만이라도 활짝 꽃피었으면 좋겠다. 부디 기복신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복천암이 아니라 스스로 복을 일구는 복전암(福田庵)이 되기를….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3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속리산 , #복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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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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