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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 상금마을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 마을 주변에는 현재 184기가 남아 있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 전북 고창군 상금마을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 마을 주변에는 현재 184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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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밀려오는 감동이 파도가 된다. 음악의 한 흐름처럼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모습이 축제의 함성으로 변하면서 자꾸 더 크게 그려진다. 고창 고산 아래 상금마을 고인돌은 그렇게 내 마음에 파고 들었다.

처음 가로누인 바위에 붙은 번호판이 무심하게 눈에 들어 왔다. 그냥 보았다. 그리고 길을 따라 더 내려오는데 그 번호판 붙은 가로누운 돌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었다. 조금 궁금증이 돌기 시작했다. 옆에 가는 김현수 선생이 “저건 고인돌입니다” 하고 말을 던진다.

“저건 고인돌입니다. 보세요, 저 거대한 돌 아래 받쳐 놓은 몇 개의 돌을 보세요. 이곳에 이렇게 많은 고인들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산이 성지라는 뜻입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무덤인데요. 그래서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신성시된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고인돌은 무게가 100톤까지 나가는 것도 있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 고인돌은 무게가 100톤까지 나가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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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산 이름이 ‘고산(高山)’일까? 527m 높이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 고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의미가 궁금했다. 보통 ‘고산’은 고창 들녘에 높이 솟아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선사시대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 무더기로 있는 산이어서 ‘고산’이라고 붙여졌을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6일(토) 오후 2시에 산을 좋아하는 풀꽃산행팀 24명이 전북 고창에 있는 고산을 찾아 광주에서 출발하였다. 남쪽 영산강, 북쪽 동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영산기맥은 입암산, 갈재, 방등산, 문수산, 구황산을 지나 고산에 닿는다. 그리고 고성산, 월랑산, 태청산, 불갑산을 지나 목포 옆 영산강 하구에서 여맥을 끝난다. 바로 서해안 지방의 넓은 벌판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의 줄기 가운데 고산이 있었다.

오후 3시, 한 시간 정도 국도를 타고 찾아 간 곳이 고창군 대산면 석현마을이다. 아주 조그마한 석현마을은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 버스가 통행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등산로 초입이라는 안내표지가 있고, 등산로도 풀이 말끔히 깎여 있어서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영산기맥에 있는 전북 고창 고산은 제 1봉인 각시봉부터 깃대봉, 띠꾸리봉, 촛대봉, 고산 정상 등 다섯 개의 봉우리들로 이어져 있다.
▲ 고산 정상 영산기맥에 있는 전북 고창 고산은 제 1봉인 각시봉부터 깃대봉, 띠꾸리봉, 촛대봉, 고산 정상 등 다섯 개의 봉우리들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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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에서 넓게 바라보이는 고창 들녘들이 시원하였다. 조그마한 봉우리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올라가는데 제 1봉인 각시봉부터 깃대봉, 띠꾸리봉, 촛대봉, 고산 정상까지 3.8km의 거리에 다섯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었다. 깃대봉을 지나 용머리 형상의 용두암을 밧줄에 의지해서 오르니 사방이 더욱 시원하게 보인다.

고산 오르는 길목에 하얀 점들이 나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정상에 오를수록 더 탐스러워지는 하얀 구절초들은 밤하늘에서 내려온 별처럼 능선 곳곳에 박혀 있었다. 하얗게 그 자리에 피어 있었다. 가을 산행에서 다가오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구절초꽃 한 송이를 만나는 것이다.

제2봉인 깃대봉부터  띠꾸리봉과 촛대봉, 고산 정상에서 장군봉, 옥녀봉까지 후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고산산성(약 4.1km)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길에 흩어져 있는 돌들만이 그 시대의 흔적을 말하고 있었다.

고창 고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고창 들녘의 황금물결
▲ 고창 들녘 고창 고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고창 들녘의 황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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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고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고산’이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정상에 서자 사방이 다 들여다보였다. 광주 시내의 많은 아파트들이 보였고, 영광 법성포의 모습과 고창의 황금 들녘들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해가 짧아진 가을 산행은 길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상금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3km 정도의 길이었으나 가파르지 않고 잘 정비된 길이어서 걸음이 빨랐다. 내려오는 길에 떨어진 쥐밤들을 줍거나 딱 벌어진 얼음 열매 하나를 따는 즐거움도 같이 누렸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데, 큰 돌을 괴어 놓은 돌무덤인 것이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데, 큰 돌을 괴어 놓은 돌무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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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썼던 무덤이다. 극소수 지배자만이 아닌 지배계층 모두가 썼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군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썼던 무덤이다. 극소수 지배자만이 아닌 지배계층 모두가 썼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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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릿재 삼거리를 지나 딸기평전과 고원늪 지대를 지나 내려오고 있었다. 길 가에 큰 바위가 하나 가로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번호가 새겨진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바위에 무슨 표지판이 있네’하는 정도의 느낌을 갖고 계속 길을 내려왔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목에 숫자가 연이어 있는 많은 돌들이 눈에 띄었다. 김현수 선생이 고인돌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산을 찾았지만 이렇게 많은 고인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고인돌에 대하여 망각하고 다녔던 산행이어서 고인돌이라고 느끼고 대했던 그 큰 바위들은 처음인 것이다. 바위라고 해도 그 수많은 바위들을 밟거나 옆을 지나왔던 수많은 산행들이었는데, 그 바위가 무슨 의미로 다가온 것은 처음인 것이다.

한반도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남북 지방의 2만여기를 합쳐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는 무려 3만여기로 전 세계 고인돌 5만여기의 60퍼센트에 해당된단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 한반도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남북 지방의 2만여기를 합쳐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는 무려 3만여기로 전 세계 고인돌 5만여기의 60퍼센트에 해당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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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남북 지방의 2만여기를 합쳐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는 무려 3만여기로 전 세계 고인돌 5만여기의 60퍼센트에 해당된단다. 최근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군과 함께 전북 고창군의 고인돌들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큰 돌을 괴어 놓은 돌무덤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썼던 무덤이다. 극소수 지배자만이 아닌 지배계층 모두가 썼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곳 상금리 고인돌은 논과 밭이 개간되기 이전에는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이 184기이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BC 4-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상금리 고인돌은 1m 정도의 작은 것에서부터 2-3m에 100톤까지 나가는 거대한 바위를 괸 고인돌이다.

어떤 고인돌 앞면은 무슨 표시 같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세월이 풍화시켜버려 그냥 돌이 패인 흔적인지, 아님 선사시대 그분들이 무슨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보통 앞면은 반듯한데 그곳에 정연하게 패여 있는 부분들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최근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군과 함께 전북 고창군의 고인돌들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 최근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군과 함께 전북 고창군의 고인돌들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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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청동기 시대(BC 4-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상금리 고인돌은 1m 정도의 작은 것에서부터 2-3m에 100톤까지 나가는 거대한 바위를 괸 고인돌이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군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BC 4-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상금리 고인돌은 1m 정도의 작은 것에서부터 2-3m에 100톤까지 나가는 거대한 바위를 괸 고인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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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윗돌을 운반하는데 200-300여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 운반 과정과 고인돌을 세우는 과정은 하나의 축제가 되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큰 통나무를 돌 밑에 깔고 줄을 이어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노래가 온 산에 울려 퍼졌겠다.

저 멀리 서해안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은 당시 부족국가의 합창이었고, 축제였을 것이다. 비록 숨을 거둔 지배계층의 무덤을 만드는 작업이었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힘이었고, 그들의 자존이었을 것이다. 그 힘을 바탕으로 부족국가가 존속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넓혀 갔을지 모른다.  그 모든 힘이 바로 고인돌을 세우는 축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라고는 없는 고인돌 무리들이었지만 그 고인돌들을 지나고 온 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동안 커다란 바위들을 수없이 많이 만났지만 이곳에서 만난 바위들은 선사시대를 살았던 선인들의 숨결로 살아나 지나온 나의 발걸음을 따라 마음속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일까?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고인돌을 세우면서 큰 통나무를 돌 밑에 깔고 줄을 이어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노래가 온 산에 울려 퍼졌겠다.
▲ 고창 상금마을 고인돌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고인돌을 세우면서 큰 통나무를 돌 밑에 깔고 줄을 이어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노래가 온 산에 울려 퍼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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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인돌, #고창, #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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