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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꽃. 9월 30일 집  근처.
 고구마꽃. 9월 30일 집 근처.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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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틈나는 대로 산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산에 올라 멀리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탁 트여서 좋다. 산에 오르는 동안에는 처음 보는 꽃과 마주치는 것도 재미있다.

예전엔 산에 오르기 전날 밤엔 식물도감을 꺼내놓고 공부를 하곤 했다. 미리 다음날 산행에서 부딪칠만한 꽃이나 나무에 대해 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준비를 해도 막상 산에 가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꽃과 마주치기 마련이다. 그럴 땐 생긴 모양을 머릿속에 담아와서 식물도감을 샅샅이 뒤졌다. 지금은 디카를 사용하니 찰칵, 찍어오기만 하면 되니 꽃 이름 찾기가 훨씬 수월하지만 그땐 그랬다.

배한봉 시인은 "느낌도 없이 이름부터 외우는 것은/아니다, 사랑 아니다(시' 각인')"라고 썼지만, 이름을 외는 것이 사랑의 첫걸음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다. 덕분에 내공이 조금씩 쌓여 지금은 산에 가면 웬만한 꽃은 이름을 다 아는 편이다. 

고구마꽃 다섯 송이.
 고구마꽃 다섯 송이.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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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항상 '그러나'에 있다. 지가 꽃이름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작년 늦여름이었던가.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고구마꽃 사진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아, 고구마도 꽃이 피는구나. 꽃에 대한 내 내공이란 게 별것 아니었구나. 얼마 전엔 또 토란꽃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다.  뭐라고? 토란에도 꽃이 있다고? 이렇게 되자 꽃에 대한 내 내공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말았다.

며칠 후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오다가 토란이 심어진 밭 옆을 지나게 되었다. 퍼뜩 토란꽃에 생각이 미쳤다. 꽃을 찾으려고 토란의 위 아래를 유심히 살펴봤다. 토란꽃은 "나 찾아봐라"라는 듯이 토란 잎 아래 황달 든 얼굴을 한 채 살짝 숨어 있었다.

이제 토란꽃은 보았으니 고구마꽃만 남았구나. 어디선가 영동 천태산 자락 고구마밭에 가면 무더기로 핀 고구마꽃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언제 짬을 내어 천태산이나 한 번 가볼까.

고구마꽃 3형제.
 고구마꽃 3형제.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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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까짓 고구마꽃을 보려고 일부러 발품을 팔 것까지야 있는가. 언젠가 기회가 오면 보게 될 날이 있겠지. 마침내 지난 일요일(9월 30일),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고구마꽃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먼 곳이 아닌, 새벽마다 오르내리는 내 산책길에서.

기회란 본디 긴장의 산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순간에 오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놓치고 만다. 마침내 고구마꽃을 만나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고구마밭을 그냥 스쳐 지나가려는데 고구마줄기 사이에서 언뜻 메꽃 같은 것을 본 것 같았다.

아아, 그것은 고구마꽃이었다. 얼기고 설긴 고구마 줄기 사이에서 꼭 다섯 송이의 고구마꽃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세 송이는 같이, 두 송이는 또 따로. 마치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반가웠다. 자신의 꽃 위에다 빗방울을 요리조리 굴리며 놀고 있는 홍자색 꽃이 사뭇 요염했다. 나를 기다리느라 여태 지지 않고 있었던가.

빗방울을 머금은 고구마꽃.
 빗방울을 머금은 고구마꽃.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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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머리에 앉아 '고구마꽃에 관한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시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요새 죄가 많소. 시인도 아니면서 시를 쓰고. 오냐, 시가 됐든 수필이 됐든지 간에 얼릉얼릉 써 보거라. 마침내 죽은 어머니, 아버지의 고무찬양에 힘입어 짝퉁 시 한 편을 탄생시켰다.

누가 심었을까
산비탈 밭뙈기
코딱지 만한 고구마밭
얼기고 설킨
고구마 줄기 사이에서
그토록 보기 어렵다는
고구마꽃 다섯 송이
빠끔히
고개 내밀었다


놀라워라
고구마가 숨겨놓은 1인치 
저 고구마는 여태
어디에 저토록 고혹적인 꽃을
꼭꼭 감춰두고 있었을까


우리나라 아낙들도
저 고구마꽃 같다
일생을 부엌데기로 치부하며
쥐 죽은 듯 살아가지만
맘껏 꾸민 후

길 나서면
저리 요염하게 피어나지 않겠느냐. - 졸시 '숨은 꽃' 전문

올해 나는 운 좋게도 희귀한 두 가지 꽃을 연거푸 보았다. 그것은 또한 내게 새삼스런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원에 심어진 화초나 산야에 무리지어 피어나는 들꽃만이 꽃이 아니라 밭에 심어진 작물들 꽃도 꽃이라는 걸. 게다가 밭작물들의 꽃은 사라지면서 크고 작은 열매를 남겨 우리들에게 먹을 거리를 공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세상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고 놓치는 숨은 꽃이 너무 많다. 그동안 난 화려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꽃만 선호하며 살았다. 차후로는 내 삶이 백일하에 드러난 꽃보다 숨은 꽃에 눈돌리고 그 꽃에 감사하며 살았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 *고구마는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메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태그:#고구마꽃, #토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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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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