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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를 건너 
건너편 노량진 앞바다를 바다봅니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장소입니다.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요....
▲ 남해의 관문, 남해대교 남해대교를 건너 건너편 노량진 앞바다를 바다봅니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장소입니다.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요....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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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이 벌써 까마득하다. 그리고 그 여름의 기억을 떠올리려니 어색한 감도 없지 않다.벌써 가을인 탓이다. 하지만 그냥 묻혀 두기에 참 아름다웠던 기억이기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꺼내 보이려 한다.

8월 둘째주는 내내 비가 내렸다. 우리가 여름휴가를 떠났던 그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는 불현듯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보성 차밭에서 하루를 보내고 남해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해의 시린 바닷빛이 나를 반겨 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무리였다. 비만 그쳐 준다면 다행이겠다 싶었는데 비가 내리는 간간히 태양빛이 선심을 쓰듯 내리 쬐는 기가막힌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 살짝 살짝 보여준 바다의 푸른빛은 감탄스러웠다. 그러니 게릴라성 호우마저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달 모양을 닮아서 월곶 해변?
▲ 월곶해변 정경 달 모양을 닮아서 월곶 해변?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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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를 이끈 노량진 앞 바다에 걸린 남해대교를 건너면서 남해는 내게로 그렇게 미끄러져 왔다.  생애 처음 남해를 방문하는 구나 싶었는데 남해대교의 붉은 아치를 보는 순간 문득,  중학교 수학여행때 남해대교를 건넌 기억이 났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랄수 있는 충렬사에 들렀을 때, 그리고 노량진 앞 바다에 그 당시 거북선을 그대로 복원한 배를 방문했을 때도 잊었던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거의 삼십여년의 세월이 훨씬 지난 과거에 이곳을 보았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 조금은 난감했었고,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남해는 유적지를 포함해 섬 자체가 문화유적이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워 이틀이라는 시간에 둘러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오백여년전, 한 어부가 낚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씨앗이
자랐다는 왕후박나무는
임진년 이순신 장군이 휴식을 취했다 하여 '이순신나무'라고도 불린다.
▲ 창선도 왕후박나무 오백여년전, 한 어부가 낚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씨앗이 자랐다는 왕후박나무는 임진년 이순신 장군이 휴식을 취했다 하여 '이순신나무'라고도 불린다.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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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는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깊은 섬이다. 그런 면에서 매우 역사적인 섬이랄수 있는데 남해의 관문인 노량진 앞 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거룩하게 순국하신 장소요, 남해를 빠져나가는 사천대교 또한 '사천포해전'의 전적지이다.

들어오고 나가면서 이순신 장군을 자연스럽게 떠올려보게 되는 섬, 남해는 곳곳에 충렬사며, 이락사등 이순신 장군과 연관이 깊은 장소가 포진해 있다.

특히, 남해의 창선도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하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오는 여행지가 되어 주었다. 남해섬을 한바퀴 돌아, 사천대교를 앞두고 창선도를 거쳐가야 했다. 창선도는 남해의 새끼섬 정도인데, 그 크기는 새끼섬이라고 하기에 작지 않아 보였다.

팻말을 못 찾아 사천대교 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왔는데 다행히 '왕후박나무' 는 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왕후박나무는 난대성 상록수라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서식하는 나무라 한다. 창선도의 왕후박 나무가 이순신 장군과 인연을 맺은 사연이 이러하다.

사천포해전이 한창이던 때 이순신 장군이 부상을 입고 병참기지로 이동하던 중 잠시 창선도의 왕후박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함께 온 참모들과 점심을 드셨고 후박나무 아래서 쉬다 가셨다는 이 나무는 오백년 이상이 되었다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지나온 나무처럼 보였다.

우람한 나무둥치며 길게 뻗은 가지 사이로 할아버지 나무, 아버지 나무, 손자나무까지 삼대가 하나의 둥치에 한살림을 차리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스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썰물에 드러난 창선도 앞바다에 
바닷길이 열렸다.
▲ 창선도 앞바다 썰물에 드러난 창선도 앞바다에 바닷길이 열렸다.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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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깊은 나무의 내면엔 나무의 정령이 살고 있을 법한 신성함을 주는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무 그늘 아래는 평상이 놓여 있고 그 평상엔 마을 주민들이 수박을 썰어 놓고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후박나무 열매를 줍는 젊은 부부도 있었다. 나무열매를 주워서 나무모종을 키울거란다. 둥글고 작은 열매가 예뻐서인지 아이들도 곁에 끼어 열매를 줍느라 손놀림이 바빠졌다.

남편과 나는 평상 한켠에 앉아 그 날, 이순신 장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휴식을 취했다. 길게 뻗은 후박나무 가지는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했고, 서늘하기 그지없어 솔솔 졸음이 몰려 왔다. 집으로 갈 여정을 잠시 접어두고 한잠을 달게 자고 일어났다.

손에 잡힐 듯 바다가 가까워 보이는 위치였다. 바다와 나무 사이에 푸르게 벼가 익어 가는논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 전체를 산능선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이 마을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벼가 잘 익어 가는 논과 넓은 바다는 풍요로움을 대신했다. 실제로 창선도 앞바다에선 여러가지 물고기가 잘 잡힌다고 했다.(이 나무는 실제 물고기와 관련이 깊다. 이 마을에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한 늙은 어부가 잡은 물고기에서 나온 씨앗이 자라 왕후박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매년 후박나무 아래서 당제를 올리며 풍어를 기원한다고 ).

어쩌면 왕후박나무가 마을을 지켜 줄지 모른다는 마을 분들의 이야기 속에는 창선도 사람들의 왕후박나무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듣고 있는 아이들이 예뻐서 였는지 한 분이 집에 가서 잘 키우라며 왕후박나무 발치에서 혼자 싹을 틔운 어린 나무 한 그루를 주셨다.

마을분들이 와서 쉬었다 가고
오수를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가지 넓은 왕후박나무
▲ 왕후박나무 아래서 마을분들이 와서 쉬었다 가고 오수를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가지 넓은 왕후박나무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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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라고 하기에 너무 여리고 작은 싹을 아이는 소중히 음료수 팩에 담아왔다. 지금 우리 아이 화분에 그 후박나무 한그루 잘 자라고 있다. 후박나무를 키우면서 아이는 창선도의 왕후박나무 아래서의 휴식을 기억하겠지.푸른 나무 그늘아래서 바라본 남해의 파란 바다빛도 떠올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본다. 지금 아이 손가락 크기로 자란 저 어린 후박나무를 잘 키워왕후박나무가 되거든, 남해의 그 바다, 창선도에 심어 주면 어떨까 하고.

지금,  어린 후박나무를 보며 남해의 그 푸른 바다를 떠올린다. 창선도 왕후박나무 아래서의 그 여름이 벌써 그립다.


태그:#남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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