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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 나이 5살 나던 해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돌아가신 걸로 믿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우리 3형제를 거의 도맡아 키우시게 되었지요.

 

남자는 밥을 많이 먹어야 큰일을 한다며 끼니때마다 늘 할머니는 한 그릇 가득 밥을 퍼 우리에게 내미셨습니다. 6·25를 겪고 배고픈 시절을 보낸 할머니로선 그럴 법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음을 철이 들면서, 아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 없이 크는 것이 안쓰러워 우리가 먹는 것에 특히 신경 쓰셨다는 것을. 할머니가 푸신 그 밥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할머니의 눈물이었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할머니는 우리 3형제의 입성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라 누가 흉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아마도 그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밖에 나가기 전에도, 놀다가 집에 돌아와서도 늘 말끔히 씻긴 후, 그리 더럽지도 않은 옷을 벗기고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셨지요. 그때는 귀찮고 그런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왜 그리 서럽게 추억되는지, 이제야 철이 든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잠자리도 꼭 챙기셨습니다. 집안일을 마치고 들어오신 할머니는 이불 속에 나란히 누워 있는 우리들 곁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풀어내셨지요. 두런두런 들려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우리는 잠이 들었습니다. 스르르 눈이 감기면 할머니는 우리 이마를 차례대로 쓰다듬어 주셨고, 우리는 그 온기를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할머니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에 큰 인물 되라시며 생일밥을 할아버지의 그 큰 밥그릇에 담아주셨습니다. 저는 할머니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고, 첫 소풍도 할머니와 함께였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먹고 자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 마산을 떠났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모 삼계탕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할머니께 모시 윗도리를 사드렸습니다. 할머니는 돈을 벌 만큼 큰 손자가 대견한지 처음엔 기뻐하시다가 이내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소나무 껍질마냥 거친 손으로 제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니 장가가서 애 낳은 거는 보고 내가 죽어야 될 낀데’라고 하시며… 하지만 하늘은 그런 할머니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997년 추석날 아침. 그 전날 아는 분과의 술자리로 저는 약간 취해 밤늦게 잠이 들었고, 할머니를 꿈에서 뵈었습니다. 그 전까지 간혹 꿈에 할머니를 뵙곤 했지만 그날처럼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습니다.

 

꿈속에서 할머니의 그 목소리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할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온화한 표정으로 저더러 얼른 오라며 손짓하셨지요. 그렇게 몇 번을 부르셨는데, 저는 할머니의 그 부름을 끝내 외면하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선 저는 무엇 때문인지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너무 서럽게 울다가, 울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냥 꿈일 뿐인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감정을 좀 추스르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더군요. 세수를 하는데, 속절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멈추지가 않았습니다. 자꾸만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왔습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제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아내는 처음에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치 감염이라도 된 듯 따라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더러 울지 말라고 하면서… 한참을 둘이서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무선호출기(삐삐) 소리가 울렸고, 음성메시지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기계음처럼 들리는 형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얼른 온나.’

 

추석 날 오후, 점심을 드신 할머니는 갑작스런 호흡곤란 현상을 보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인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저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차례를 지낼 때도, 식사를 하시면서도 제 이름을 부르시며 찾으셨고 합니다. ‘우리 원중이는 와 안 오노, 와 안 오노...’

 

그해 추석까지 저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몇 년간 고향 마산에 가질 못했습니다. 아니 안 갔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그냥 가슴에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향수 또한 묻고 살아야만 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할머니께서 당신이 돌아가시면서 절 마산으로 오게 할 줄이야.

 

입관할 때 할머니를 봤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슨 말씀을 하실 것 같은데, 마음속으로 아무리 할머니를 불러도 할머니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너무 큰 죄를 지어서인지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장손인 형님 대신 제가 할머니 영정 사진을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초등학교 입학식 때 제 손을 잡아주셨듯이 할머니 가시는 길은 제가 모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씻을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지만, 좋은 데 가시라고 장지로 가는 내내 빌었습니다. 제 가슴에 간직한 할머니를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보내드렸습니다.

 

삼오제를 치르고 집에 왔습니다. 밥맛이 없다 하니 아내가 술상을 봐왔습니다. 몇 잔을 마셨을까, 이제는 두 번 다시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뭔가 ‘울컥’하고 넘어왔습니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할머니를 부르며 한참을 대성통곡 하였습니다. 제가 살면서 소리 내어 울어보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승에서 할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이제 어린 시절 할머니에 대한 그 추억만 오롯이 남았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할머니께서 제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면 내가 더 행복해진다는 걸 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전 아마 알지 못했을 겁니다. 얼마전에 오픈한 '마산사랑(www.lovemasan.com)'을 운영하면서 더 절실히 느낍니다. 많은 분들이 만나 저처럼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이야기도 하고, 즐거운 담소도 나누고 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는 그날까지…. 


#할머니#고향#마산#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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