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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무책임한 어른들도 있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찰가난과 무식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노름과 술에 빠져 사는 아비들이 그 경우였다. 아비가 팽개친 가족의 생계는 어미가 고스란히 떠맡았다. 품팔이에 삯바느질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었다.


형편이 이런데도 아비는 어미 앞에서 큰소리였다. 큰소리뿐이 아니었다. 감춰둔 돈 내놓으라며 닦달했다. 하늘같은 남편이 달라면 줘야지 어디 숨겨두고 안 내놓느냐고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무책임해도 그가 가장이었다. 무책임한 가장을 둔 가족들의 삶에선 고통이 질펀하게 묻어났다.


가해자의 시각을 여과 없이 전달한 책


곤도 시로스케. 1907년부터 1920년까지 창덕궁에서 순종의 측근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궁궐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이왕궁비사>란 책을 펴냈다. 최근 국내에서 이 책을 <대한제국 황실비사>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알고 싶다는 호기심 하나로 읽어내기엔 굉장히 불편한 책이다. 식민지 관료가 되어 창덕궁에 근무하던 일본인의 시각이 조금도 여과되지 않은 채 곳곳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일병합이 2000만 조선 민중의 평안과 안정된 생활을 위한 일이었고,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인과 가장 가까웠으며 조선에 문화적 혜택을 주었고 조선인들에게 크고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라 떠벌이고 있다.


3·1운동을 지켜보는 시선 역시 전형적인 식민지 관료의 시선이다. 총독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일본제국이 조선을 놓아줄 아무런 이유도 없고, 현재로도 앞으로도 독립은 몽상일 뿐인데 느닷없는 만세운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책의 군데군데 ‘역사 바로보기’란 항목을 삽입해서 식민지 관료의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지만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대한제국 황실비사>란 제목으로 번역한 책이 오히려 식민지 관료의 식민통치 과정을 널리 홍보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황제권 강화에만 매달렸던 대한제국 황실


대한제국,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서 1년여를 지난 뒤 돌아와서 선포한 국가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만고불변의 권한을 누린다는 황제의 나라가 된 것이다. 대한제국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민권과 국권을 확립하고 개혁을 추구했던 독립협회를 탄압하고 해산시켰다.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정규 군대에 전투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들불처럼 의병이 일어나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심지어는 의병 해산을 명하기까지 했다.


원수부를 설치해서 지키려고 했던 것, 만고불변의 무한 권한을 누린다는 황제권을 선포한 것에서 백성의 안위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운이 기울어도 백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어도 원수부를 강화해서 궁궐의 안위를 지키려 애썼다. 황제권의 강화가 다른 어떤 가치보다 앞섰던 게 대한제국이었다.


<대한제국 황실비사>란 번역본을 읽으며 식민지 관료들의 편향된 시각에 소름이 돋았다. 더불어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굴종을 거듭했던 대한제국 황실의 무능과 무책임에 진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무책임한 가장을 둔 가족들의 삶에선 고통이 질펀하게 묻어났다.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한제국 황실을 모시고 살던 백성들의 삶에도 고통이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덧붙이는 글 | 곤도 시로스케 저/ 이언숙 옮김/ 신명호 감수, 해설/ 2007.8.1/ 이마고


대한제국 황실 비사 - 창덕궁에서 15년간 순종황제의 측근으로 일한 어느 일본 관리의 회고록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언숙 옮김, 신명호 감수, 이마고(2007)


태그:#대한제국, #황실,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왕궁비사, #곤도 시로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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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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