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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머리는 말, 꼬리는 뱀, 옆구리는 날개, 발은 매 발톱, 뿔은 사슴, 눈은 악마, 목덜미는 뱀과 호랑이, 배는 연체동물, 비늘은 물고기, 귀는 소… 세상에 아름다운 건 한 몸에 걸고 으스댑니다.

그리고 용은 일반적으로 여의주로 상징됩니다. 여의주에서 힘이 나오기 때문에 빼앗기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용은 비를 몰고 다니므로 농사꾼에겐 누구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비가 너무 헤퍼 올해 흉년이 든다고 욕도 많이 먹고 애를 태우더니 오늘도 전국에 가을비가 내리겠다는 예보입니다.

용머리는 6월부터 산 속에서 피어나 지금도 한창입니다. 용의 머리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꽃물은 보랏빛으로 새파란 가을 하늘을 닮아갑니다.
▲ 용머리 용머리는 6월부터 산 속에서 피어나 지금도 한창입니다. 용의 머리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꽃물은 보랏빛으로 새파란 가을 하늘을 닮아갑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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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늘 야생화 정원을 돌아보며 대화를 나눕니다. 여름내 피고 지기를 계속한 용머리 꽃무더기가 흔들리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일어납니다. 무얼까. 갈색 등에 붉은 가슴을 번득이며 구렁이 세 마리가 한참 열애중입니다. 징그럽기도 하고 한편 신기해 뱀들을 하나하나 떼어놓으니 고개를 바싹 들고 긴 혓바닥을 널름대며 용머리 대를 똬리처럼 감고 도망갈 줄을 모릅니다. 참 겁도 없이 용머리 앞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습니다.

용머리의 꽃말은 '승천'이며 잎은 로즈마리와 비슷합니다.
▲ 쌍용머리 용머리의 꽃말은 '승천'이며 잎은 로즈마리와 비슷합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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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면 좋을꼬. 놔두자니 징그럽기도 하고 가을 뱀은 독기를 품고 있다는데 물리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입니다. 때려잡으려니 지옥이라도 갈 것 같은 마음에 집게로 목을 죄어 앞산에 갖다 버립니다.

용머리 꽃밭에서 등은 갈색, 배바닥은 붉은 색의 능구렁이를 세마리나 사로잡아 산 속에 내다 버렸습니다. 행여 굴러온 복을 차버린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 능구렁이 용머리 꽃밭에서 등은 갈색, 배바닥은 붉은 색의 능구렁이를 세마리나 사로잡아 산 속에 내다 버렸습니다. 행여 굴러온 복을 차버린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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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입니다. 핸드폰이 막 울려댑니다. 장모님이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져 사위를 보고 싶다하십니다. 무 배추 밭도 매고 북도 줘야 하련만 일손을 놓고 부리나케 강릉을 향해 달려갑니다. 서둘다보니 고속도로 상에서 무인 단속기에 속도위반으로 몇 번인가 걸려 벌금을 단단히 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과속에 걸린 건 돈 몇 만원으로 때우면 그만이지만, 저녁시간에 큰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 막 걸음마를 배워 천방지축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장손이 주방에 들어가 전기밥솥 꼭지를 빼는 통에 화상을 단단히 입었습니다. 아기가 죽겠다고 펄펄 날뛰며 야단입니다.

웬 날벼락인지… 응급실을 찾아 손바닥에 부풀어 오른 물집을 터뜨려내는데 또 한 번 자지러집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가슴이 터지고 간장이 타 들어갈 듯합니다. 그 순간의 저림이 어떤 것인지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은 다 압니다.

언제인듯 싶게 커서에 매달려 컴퓨터가 한창입니다.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 쫑, 컴퓨터 앞에 언제인듯 싶게 커서에 매달려 컴퓨터가 한창입니다.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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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다', '춥다고 이불을 들썩이면 바람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억지로 일을 행하려다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또는 조용히 지나가도 되는 길에서 풀숲을 건드려 뱀에게 물릴 위험을 만든다 했습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되돌아보니 용머리 아래 소풍을 나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구렁이들을 괜스레 건드려 그 분풀이로 오늘 이 재(災)를 당하지 않았나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구렁이는 예부터 집안에 복을 불러오는 수호신이라는데 함부로 잡아 세 마리씩이나 내다 버렸으니 굴러온 복을 내차 구렁이가 화가 났는가 싶기도 합니다. 또 용머리가 검은 악룡으로 변해 요사(妖邪)를 부린 게 아닌가 의심을 가져도 봅니다.

인물의 됨됨이가 출중하면 가는 곳마다 악룡이 나타나 훼방을 놓는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악재가 행여 우리 장손의 큰 인물됨을 암시하는 조짐이라면 한결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한 쪽 손으로 숟갈질을 잘도 합니다. 이것 쯤이야..어서 먹고 빨리 나야지..또 한 번 웃어 봅니다.
▲ 밥먹기 한 쪽 손으로 숟갈질을 잘도 합니다. 이것 쯤이야..어서 먹고 빨리 나야지..또 한 번 웃어 봅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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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큰일입니다. 내일모레면 아비어미가 나타나 거즈와 붕대를 칭칭 감은 어린 손을 보고 얼마나 아파할지 한 걱정입니다. 아이와 새 봐준 공은 없다더니 바로 그 꼴입니다.

오늘도 용머리는 진보라색으로 피어나 가을 하늘빛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어서 어린 것의 부풀어 오른 손바닥 물집이 구덕해져 새살 돋아나 손재롱을 보았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윤희경이나 '북한강 이야기'를 치면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용머리, #능구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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