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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삼각전적관의 변신

 

도피안사를 나와 고석정으로 향했다. 노동당사, 도피안사와 함께 철원을 대표하는 상징 고석정. 어쩌면 그곳은 분단하고 상관없이 많은 관광객을 끌 수 있는 철원의 유일한 자원인지도 모른다.

 

고석정에 도착,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이것저것 물어왔다. 요지인즉슨 "그냥 고석정만 구경하기 위해 차를 세워둘 것이냐, 아님 민통선을 넘어 안보견학까지 할 것이냐"였다. 그것은 도라산 전망대, 임진각, 제3땅굴 등을 하나로 묶은 경기도의 관광 상품과 비슷한 것으로, 서부전선과는 달리 자신의 차를 끌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 안내 차를 따라 전망대, 제2땅굴 등 민통선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주차비에 안보견학 비용까지 단돈 1500원. 순간 싸다고 느꼈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안보교육을 시키는 데 오히려 많은 돈을 받는 건 어불성설이다. 교육을 받아주는 것도 감지덕지할 일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우리는 흔쾌히 안보견학을 신청했고 그 시간에 맞춰 고석정 관람을 위한 2시간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차장 옆에 전시된 큼지막한 비행기와 야포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뚝 서 있는 유치한 모습의 '철의삼각전적관'. 뻔한 스토리였다. 전쟁무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후에, 전시관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철의 삼각 전투를 보여주며 북괴의 만행을 보여주는 진부한 스토리.

 

아이들을 제외하고 과연 누가 그 식상한 이야기에 또 귀를 기울이겠나 싶었지만 고전은 역시 고전 그 자체로서 힘을 가지고 있는 법.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전시관을 드나들었고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 전시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구경거리를 찾아 움직이는 관광객의 본능이겠지만 어쩌면 반공교육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갖 편견을 안고 들어간 전시관 내부는 생각 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똘이장군에 나오는 두더지나 돼지가 전시되어 있을 줄 알았건만 그곳에는 전시관의 무시무시한 이름과 상관없는 꽤 다른 모습의 북한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북한의 일상들. 물론 주민통제나 과도한 사회의 정치화 등이 전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 역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사회주의 북한의 현실인 바, 전시는 비교적 보편적인 시각으로 북괴가 아닌 북한을 그려내고 있었다.     

 

전적기념관에서도 사라진 주적. 이런 상전벽해를 단순히 시간의 흐름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이는 결국 DJ 이후 10년 간 국가를 통치해 온 집권세력의 정당성과 관련이 깊다. IMF 이후 심각해지는 양극화, 삶의 비정규직화 등 계속해서 나락으로 빠지는 경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들에게 대북관계의 개선이야말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적 기념관에조차 그들의 대북관이 전시될 수밖에. 그들이 친북좌파 소리를 듣는 건 북한하고 친하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을 워낙에 우려먹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것마저도 그들의 노력 때문인지 아님 세계정세의 변화 때문인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대북관계는 과거 집권세력과 현 집권세력의 가장 극명한 차이인 것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경제만을 강조하는 야당에 맞서 범여권이 대선의 필승카드로 주야장천 북한을 언급하며 평화세력을 자처하겠는가.

 

고석정을 지나 민통선 안으로

 

전시관을 나와 고석정으로 향하는데 입구에서 두 개의 기둥을 밀어뜨리고 있는 동상이 보였다. 임꺽정이었다. 안내판을 보니 조선 명종 때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의적 임꺽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동상이었다. 그런데 전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던 동상이건만 이번에는 그 존재 자체가 상당히 거슬렸다.

 

국가가 의적을 위해 동상을 세운다? 왕조사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에게 임꺽정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 혹여 이 혼란한 시대에 임꺽정 같은 이가 나타난다면 국가는 그 존재를 의적으로서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용인해 줄 수 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결국 의적이란 민중들의 반체제적 영웅이며, 국가의 영웅 숭배는 그 영웅에 대한 존경이라기보다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위한 이미지 차용에 불과하다.

 

동상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화려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석정이었다. 비록 비가 온 뒤라 흙탕물이었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은 계곡의 수려한 암석들과 어울려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바로 앞의 바위는 그 기묘한 모습으로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풍광이 이 정도쯤 되니 선인들이 이곳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읊었었다고 하지. 어쩌면 분단 때문에 이 아름다운 풍경이 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고석정에는 그 이름과 달리 정자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사람들이 서서 구경하는 곳이 정자의 형태를 띠고는 있었지만 20세기에 만든 이 엉성한 모습의 구조물이 그 주변의 모든 풍광을 대변하는 이름을 가질리 만무할 터, 결국 고석정의 정자는 지금까지 민중들의 관념 속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과거의 것임이 분명했다. 왜 정자의 이름이 이곳 지역의 이름을 대신하게 된 것일까?

 

물론 그 이유로 고석정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은 그 지방 풍경의 화룡점정으로서 옛 정자를 상상할 것이다. 최고의 공간에 최적의 모습으로 들어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풍류를 즐길 만한 공간으로서의 정자. 그러나 과연 고석정은 과거 민중들에게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공간이었을까?

 

아마 그곳은 임금의 휴양지일 뿐만 아니라 드넓은 철원평야를 소유했던 양반들의 연회 장소로 각광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흉작이라도 들면 고석정은 많은 농민들의 원한에 찬 아우성으로 시끄러웠을 것이며, 지명은 그렇게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유전되었을 것이다. 임꺽정이 그곳에 출몰했음이 과연 우연이었겠는가. 과거 전라도도 그랬듯이 본디 산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소작제가 발달하며 계급 간의 갈등이 큰 법이다.

 

고석정을 휘휘 둘러본 후 차에 올라 민통선을 향해 출발했다. 앞에서 안내 차량이 길을 안내하고 그 뒤로 많은 차들이 쭉 늘어서서 북으로 향하는 풍경이 예전의 현대 정주영 회장이 소를 이끌고 방북하던 때를 연상시켰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다음 해 수해로 그 소들이 모두 죽었다던데 북한은 요번 수해로 또 얼마나 많은 곤란을 겪고 있는 건지. 

 

민통선을 지나자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하더니 군인들과 초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푸른 평야를 배경으로 무뚝뚝하게 서있는 분단의 잔해들. 비록 같은 민통선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근무했던 곳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일까? 어쨌든 평화로운 벌판을 지키듯이 서 있는 철원의 군인들은 그 자체로서 매우 낯선 존재였다.

 

안보견학

 

안보견학의 첫 번째 코스는 제2땅굴이었다. 모든 안보 견학이 그렇겠지만 땅굴은 국민들의 반공의식을 다시 한 번 고취시킬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겉으로는 웃으며 악수 하지만 속으로는 남침야욕을 품고 땅굴을 파내려가는 북괴. 그 속에서 북한은 무조건 나쁜 놈들로서 규정되며, 반면 남한은 마냥 선하고 약한 피해자로서 자리매김된다.

 

그렇게 남한의 정권은 국민들에게 안보 교육 등을 통해 역사적 피해자로 가질 수 있는 도덕적 자산을 강조한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획득하게 된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 땅굴 등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확립된 피해자의 정체성은 그 교육을 받은 국민들로부터 도덕적 성찰의 기회를 앗아간다. 우리가 마냥 피해자라는 의식은 월남전에서 국군이 학살한 베트남의 민간인들을 잊게 만들며, 오히려 한-미 스프리트 훈련을 북침의 전초전으로 여겨 훈련이 열릴 때마다 비상태세를 취해야 하는 북한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국가관은 부국강병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진다. 현실적으로는 남한의 국력이 북한보다 훨씬 앞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운운하며 군비증강을 용인하고, 황우석 같은 이가 나타나 부국강병을 위해서 그랬노라면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바를 용서하는 것이다.

 

여느 땅굴과 마찬가지로 제2땅굴 역시 어둡고 음침했다. 땅굴 자체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땅굴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북괴에 관한 반공포스터와 자료 등이 철지난 냉전시대를 연상케 하며 우리를 과거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써 머리를 숙이고 전진해야 했던 나의 질문 방향은 달랐다. 과연 얼마나 많은 북한의 노동자들이 이 공사를 하면서 죽어나갔으며 북한은 왜 굳이 이렇게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공사를 강행했을까?

 

우리는 마냥 북한의 땅굴을 남침용으로 규정하여 그들의 악랄함을 선전하는 데 여념이 없지만, 어쩌면 땅굴은 60~70년대 군부의 입김이 셌던 북한의 정치적 산물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전쟁재개를 주장하는 군사모험주의자들의 욕망을 채우는 한편, 60년대 말부터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한 인민의 노동생산성을 고취시키고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 대형공사가 필요했던 북한 정권이 만들어낸 하나의 탈출구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냉전의 기념비로서 그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땅굴이 당시 남북 양측에게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동력을 제공해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남한은 땅굴을 표본으로 반공교육을 강화시켜 공포정치를 연장해 나갔으며, 북한 역시 이를 계기로 국가정체성을 다시금 천명하고 체제를 더욱 경직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땅굴을 나와 그 다음으로 들린 곳은 전망대였다. 혹여 어렸을 때 보았던, 석등이 남아있다는 궁예의 궁전터를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전망대는 언덕이 아닌 평지에 세운 건물이라 부쩍 자라버린 수풀로 인해 북녘은커녕 군사분계선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7년 전에도 그랬듯이 곧 있으면 남이나 북이나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화공작전이다, 맞불작전이다 해서 불을 지르겠지. 만약 DMZ를 농토로 쓴다면 꽤나 기름진 토양이 되려니.

 

전망대를 나오니 DMZ 내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모방해 지었다는 월하리 역사가 있었고 그 옆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그 유명한 표어와 함께 포탄에 맞은 듯한 녹슨 기차 두세 량이 흉물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 앞에서 온갖 포즈와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 현장이 북괴의 만행을 확인하기 보다는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쟁의 기억

 

월하리 역사가 안보견학의 끝이었다. 신분증을 돌려받은 뒤 민통선을 나왔지만 그대로 집으로 향하기 아쉬워 들른 곳은 백마고지전투 전적지였다. 한국전쟁 막판 한국군과 중국군이 9일 동안 12번이나 주인을 뒤바꾸며 약 1만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던 그 비극의 장소. 얼마나 많은 포탄을 쏟아 부었으면 산이 깎이고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백마 같이 되었다고 '백마고지'라 칭하는 것일까.

 

베트남전으로도 유명한 9사단, 소위 백마부대 명칭의 유래는 그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을까? 왠지 순수할 것 같은 '백마'의 언표 아래 얼마나 끔찍한 죽음들이 깔려 있는지 상상이나 할까? 전쟁이란 그런 것일 게다. 끔찍한 참상과 극도로 추상화된 상징만이 남아, 그 간극 속에서 전쟁에 관련된 기억을 각각의 구미에 맞게 재생산하는 현실.

 

전적지에 도착한 나의 눈살을 가장 먼저 찌푸리게 만든 것은 기념비 앞에 세워진 탱크에 다닥다닥 붙은 어린 아이들의 풍경이었다. 물론 나 역시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이 전쟁무기이고 지금까지도 전쟁게임을 가장 즐겨 하지만, 막상 아이들이 탱크 위에 올라 환한 웃음을 짓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쓰린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의 사회화.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철원을 둘러보는 여행의 테마로서 안보가 아닌 반전이나 평화가 채택될 때 그 가능성은 열릴 것이다.

 

백마고지전투 전적지를 나와 집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승일교였다. 그 이름의 진짜 유래와는 상관없이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이 만나 승일교가 되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만이 남은 그곳. 결국 교각의 이름마저도 우리의 분단체제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아직까지 진행 중인 전쟁의 기억. 철원은 그 기억 속에서 가장 전위에 서 있는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어느새 가을의 황금색으로 물결칠 철원평야를 그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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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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