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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종자 몸 안에 있는 물기를 온전히 말려야 겨울을 난다.
▲ 완두콩 종자 몸 안에 있는 물기를 온전히 말려야 겨울을 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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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으로 인해 새로워지는 자연

완두콩의 종자가 몸 안에 있는 수분을 죄다 빼내고는 바짝 말랐습니다. 이렇게 볼품없이 마른 것이 흙을 만나 새 생명으로 피어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자기 안에 있던 물을 전부 내어놓아야 추운 겨울을 얼어터지지 않고 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겠지요. 자기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버린 후에 이른 봄 생명의 어머니 땅이 주는 물을 모심으로 그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바짝 말라 노인네처럼 주름살이 생겨버린 완두콩 종자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을 온전히 비우고 이전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으로 자기를 채워가는 마음, 그로 인해 거듭남의 기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기적은 기적이 아니라 현실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타는 목마름으로 겨울을 난 후 흙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급하게 그 목마름을 해갈하고 싶었을까요? 잘 마른 씨앗들은 뿌리고 나면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싹을 틔우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기적, 그것은 우리네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천상의 것이 아니라 현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이 땅에 숨쉬고 살아가고 있음도 기적이요, 우리가 이루고 싶은 기적은 나를 비움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옥수수종자 올해 거둔 옥수수
▲ 옥수수종자 올해 거둔 옥수수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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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는 단지 덜 자란 것일 뿐이다

여름 내내 입을 즐겁게 해주던 옥수수, 그것도 몸 안의 물기를 비우고 있는 중입니다. 옥수수의 종자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 실한 것은 아니지만 실하지 않은 것을 빼내어버리면 실한 것들도 그 곳에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파종을 하기 전까지는 그냥 그렇게 실한 것과 부실한 것 모두 놔둡니다. 파종 직전에 쭉정이와 알곡을 나누는 것이지요. 비록 버려질 쭉정이지만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알곡들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쭉정이는 몹쓸 것이 아니라 단지 덜 자란 것일 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회 저변에 밀려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등 위주의 사회, 꼴찌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쭉정이라고 다 빼어버리면 결국 알곡도 제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 저변에 밀려난 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앞선 사람들 위주로 판이 짜여졌습니다.

대기만성형 인간은 이제 발을 붙일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예 초등학교때부터 성적으로 줄을 긋고는 어떤 대학에서 어떤 학위를 받는가에 따라 사람의 됨됨이 혹은 능력과는 상관없이 평가해왔습니다. 개천에서 용나는 일이나 대기만성이 없는 일도 아니고, 좋은 학벌을 가진 이들 가운데 좋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경쟁에서 뒤쳐진 이들은 그저 쭉정이 혹은 껍데기 정도로 치부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쥐이빨옥수수 붉은 색의 옥수수는 쥐이빨옥수수라 불린다.
▲ 쥐이빨옥수수 붉은 색의 옥수수는 쥐이빨옥수수라 불린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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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일과 믿음

올 봄 초에 강원도에 사는 지인에게서 쥐이빨옥수수 종자를 받아 올 봄에 심었습니다. 작을 줄 알았는데 일반 옥수수와 비슷해서 심어놓고도 잊고 지냈습니다. 붉디붉은 옥수수를 거두고 나서야 쥐이빨옥수수를 생각했고 삶아서 먹어보니 일반 옥수수보다 딱딱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거두는 시기를 조금 놓친듯 하였습니다. 종자로 남겨두었다가 내년에 좀 더 많이 심어 제 철에 따 먹어볼 요량으로 제법 많은 양의 쥐이빨옥수수 종자를 남겼습니다.

쥐이빨옥수수는 붉은빛 때문인지 더 야무져보입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오랜세월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성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아직 현실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보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마도 이런 믿음이 없다면 씨를 뿌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마다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미리 봄'의 차원까지 안내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미리 봄의 현실은 물론이요 지금 여기에서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종교는 잠시 흥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쇠퇴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년에 저들은 흙을 만나 새로워 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풍경중 하나다.
▲ 내년에 저들은 흙을 만나 새로워 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풍경중 하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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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들을 보며 내년의 풍성함을 꿈꾸다.

집에 남겨진 옥수수종자들입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세알 혹은 네 알씩 흙에 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싹이 나면 실한 싹 두 개씩을 남겨둘 것입니다. 혹시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은 공중의 새 혹은 땅 속에서 살아가는 벌레들의 먹이로 주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종자 한 알, 거기에서 수많은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 기적을 미리 보기 때문인지 이렇게 매달려 타는 목마름을 감내하고 있는 종자들을 보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그들은 꿈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꿈꾸게 하고, 싹을 틔운 후 무성해진 밭을 떠오르게 하고, 추수한 후 솥에 잔뜩 넣고 삶아 꺼낼 때의 향기를 미리 맡게 하고, 솥뚜껑을 열면 허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올 여름, 비가 많이 와서 농사짓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주말이면 거의 어김없이 오는 비에 많은 것들은 들짐승들이나 날짐승들의 몫으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 다시 농사짓나 봐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종자를 남긴 것을 보면 내년 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 고마워할 것입니다.

종자는 목마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비웁니다. 그래서 그 안에 꿈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만나면 참 행복하겠지요.


#옥수수#쥐이빨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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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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