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①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인마

내게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가 한 놈 있다. 사실 군대 가기 전에는 나 역시 같은 꿈을 꿨지만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꿈을 접었고, 그 녀석은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다. 하루는 학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데, 어쩌다 보니 정치와 사회 현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몇 달 전이었는데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갑론을박 하다가 녀석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인마." 아니 왜? 내가 왜 어린데? 내가 너보다 생일도 여덟 달이나 빠른데? 나는 도저히 그 놈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친구 간에 정치 얘기는 역시 안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별 내색 없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몇 달 간 못 본 사이 녀석은 가히 속칭 '청년 보수'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헤어진 뒤 나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래, 명색이 국가 관료가 되기로 작정한 놈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제 겨우 20대 중반인 우리 나이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던 것도, 그 녀석의 '꿈'에 비추어 보니 얼추 이해가 되었다. 그것이 '옳다'는 게 아니라 '이해'가 되었다는 말이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면 생각이 다 저렇게 바뀌는 건지 여전히 긴가민가했지만, 아무튼 이제 이 녀석과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조금은 부담스러워졌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런데 내가 지금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왜 어린 취급을 받아야 했느냔 말이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거든. 친구야, 혹시 네가 너무 빨리 늙어버렸기에 내가 어려보인 건 아니니? 나는 얼굴은 좀 늙었어도 아직 머리는 안 늙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말이야.

② 저는 무조건 보수에요, 한나라당이요

지난 학기 정치학 관련 전공수업을 들으며 같은 발표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무래도 수업이 수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정치 쪽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그중 한 여후배가 내뱉은 말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저는 무조건 보수에요, 한나라당이요." 나는 귀를 의심했지만, 슬프게도 내 귀는 정직했다.

내가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누구나 정치적 자유를 표현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지지 정당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내가 진정 놀란 이유는 바로 '나보다 두 살 어린 20대 초반의 여자 대학생의 입에서 저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거리낌 없는 그 애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역시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맘 같아선 너와 나 같은 젊은이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어떤 부분들이 좀 거시기한지 구구절절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내 용기와 깜냥이 부족했다.

③ 취직 좀 시켜주면 안 되겠니

ⓒ 오마이뉴스 이종호

관련사진보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대학생들이 '취직 좀 시켜주면 안 되겠니'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저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속이 쓰라려온다. '대기업을 운영해본 사람이니까 아무렴 잘 하겠지', '청계천도 복원했잖아' 같은 막연한 논리 말고 이명박 후보가 우리 20대의 고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걸 뒷받침할 좀 더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대주십시오, 또는 이명박 후보의 경제 정책이나 한반도 대운하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일자리가 생겨도 과연 어떤 일자리들이 생겨날 것 같습니까 등등의 질문은 일단 논외로 치자.

내가 저 사진을 보면서 진정 못마땅한 건 '취직'이란 하나의 사안이 국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에 가장 큰 이유 혹은 절대명제로 작용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절박한 심정의 반증일 것이다. 나 역시 같은 20대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심정적으로 공감한다. 심지어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지금의 광주정신은 바로 일자리 창출'이라고도 했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역시 청년 실업의 심각성과 일자리 창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거, 그래도 영 못마땅하다. 나 역시 저들과 같은 처지의 당사자고, 또 우리 집이 그리 잘 먹고 잘사는 집안도 아니어서 더욱 취업 걱정을 해야 하는데도,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스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취직을 시켜 주리란 믿음에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행위는 '취직만 시켜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만약 이명박 후보가 나에게 근사한 일자리를 완전 보장해 준다고 해도 이번 대선에서 결코 그를 찍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시대적 패러다임과 빈곤한 가치관, 그리고 의혹투성이 도덕성으로 무장한 그가 국가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만을 보고서 내 이해관계와 일치한다고 하여 여러 부문에서 자격 미달로 보이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는 없다. 그것은 내 양심을 배신하는 부끄러운 짓이다. 그런데 사진 속의 저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④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나와 같은 20대들에게 보여주면 과연 어떠한 반응이 나올까. 그저 '지금과는 좀 다른 옛날에 쓰인 감동적인 글' 정도이려나. 그런데 나는 항소이유서가 그저 철 지난 골동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쓰인 이 글은 2007년의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2년 전의 그때와 비교해 지금의 세상은 많이 변했다. 사실이다. 그런데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이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이었던 유시민을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로 만들어버렸다면, 지금의 사회적 모순은 '가장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비정규직 소시민'들을 하루아침에 '악에 받친 투사이자 범법자'로 낙인찍는다. 이랜드는 그래서 용서받을 수 없다. 합법도 다 같은 합법이 아니다. 인간이 소외된 법을 지키는 합법은 차라리 불법만도 못하다.

우리 20대 역시 어느 샌가 투사가 되어버렸다. 냉혹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취업 전쟁에서 칼을 빼들고 또래들과 싸운다. 그러다보니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지친다. 그래서 '빨리 늙어버렸다'. 이제는 대통령도 취업만 잘 시켜주면 뽑을 수 있다. 부당 해고된 교내 청소 용역 아주머니들의 억울함보다는 시험공부가 당연히 더 중요하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직시하고,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빨리, 그것도 곱지도 못하게 늙은 채'로 계속 살아갈 작정이 아니라면 뜻 있는 20대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⑤ 그래도 취직만 하면 되는가

젊음이 젊음다우려면, 또 20대가 20대다울 수 있으려면 시대와 사회의 현실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7,80년대처럼 화염병 던지고 데모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는 그게 불의에 항거하는 수단이었고, 그게 젊은이들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뿐이다.

하지만 불의라는 건, 또 사회적 모순이라는 건 그 모양과 형태는 다르더라도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 우리 시대의 그것들에 항상 기민하게 눈과 귀를 열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불의가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에나 유효한 이유다.

내 말은 취업이고 뭐고 팽개치고 그러다 굶어죽자는 게 아니다. 다만 현실과 치열하게 부대끼면서도 조금의 수고와 젊은이다운 책임을 발휘해 항상 그 고민의 끈은 놓지 말자는 얘긴데, 그래도 취직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덧붙이는 글 | 박형숙의 대선진맥9에 대한 피드백 글입니다.



태그:#20대, #보수화, #유시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