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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게. 지게에 발채를 얹은 것을 바지게라고 한다.
 바지게. 지게에 발채를 얹은 것을 바지게라고 한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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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꾼들이 부르는 신세타령 '어사용'

엊그제 일요일(2일), 음반들을 정리하다가 1994년 <신나라레코드>에서 출반된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 선집 11>을 발견했다. 내 애장 음반 목록에서 제외된 채 까마득히 잊혔던 음반이었다.

대단한 수집가는 아니었지만 난 한때 수집광이었던 적이 있다. 국악 음반, 책, 공연 포스터, 전시회 포스터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엔 민주화 운동 단체를 돌아다니며 항쟁 기간에 쏟아져 나왔던 성명서들을 한 장씩 수집하기도 했다. '주제넘게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6월 항쟁에 대한 장편 서사시를 써 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야심만만한 계획은 90년대 중반에 일어난 불의의 화재로 말미암아 속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지금 내가 가진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 선집 11>은 화재 이후 서둘러 다시 구입한 음반이다. 여기에는 수심가와 엮음 수심가, 긴 아리와 자진아리, 정선아라리, 정선 자진아라리, 지게 어사용 등이 녹음돼 있다. 정선 아라리나 정선 자진 아라리는 종종 다른 음반 속에서도 듣게 되는 수가 있지만 지게 어사용만은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지게 어사용이 실린 음반은 이 음반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어사용이란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자락을 오르내리면서 작대기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신세 한탄을 하는 노래이다. 소리를 길게 빼면서 구슬프게 부르는 곡조가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한 오백 년' 등 강원도나 경상도 산간지역의 토속적인 가락인 메나리조와 매우 흡사하다.

이 음반은 처음 1989년 <뿌리깊은나무>에서 12인치 LP 석 장에 담겨 <한반도의 슬픈 소리>라는 표제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LP의 시대가 가고 CD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 음반은 1994년 '신나라레코드'에서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 선집 11>로 재출반 되었다.

[왼쪽 사진] 한반도의 슬픈 소리. ⓒ 뿌리깊은나무 
[오른쪽 사진] 뿌리깊은나무조선소리선집11. ⓒ 신나라레코드
 [왼쪽 사진] 한반도의 슬픈 소리. ⓒ 뿌리깊은나무 [오른쪽 사진] 뿌리깊은나무조선소리선집11. ⓒ 신나라레코드

이 음반 속에서 지게 어사용을 부른 분은 경남 밀양시 산내면 임고리 발례동에 살던 신의근이라는 분이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닐곱 살 적부터 동네 어른인 김홍준씨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에이 억조창생 만민들아  이내 말쌈 들어보오
내 날 적에 넘도 나고 넘 날 적에 나도 났네
남과 같이 났건마는 에이
어떤 사람 팔자 좋아
고대광실 좋은 집에 부귀영화 살건마는
이내 말자 무슨 죄로(이하생략)

- '지게 어사용' 일부

노래 중간마다 "얼씨구 이후후후" 하는 말을 후렴처럼 붙여가며 스스로 흥을 돋운다. 오랜만에 '지게 어사용'을 듣다 보니 어렸을 적 추억이 떠올랐다. 나도 어렸을 적 고향에서 살았을 적엔 나무꾼 노릇을 톡톡히 했던 사람이다.

나무꾼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내 고향은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경계에 있으니 깊은 산골은 아니다. 그래도 들머리만 조금 뻔히 터졌을 뿐 사방이 산으로 꽉 막힌 곳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나무나 퇴비 만들 풀을 베러 산으로 가야 했다.

나의 어쭙잖은 지게꾼 노릇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도회지에서 학교 다닌답시고 방학 때 집에 와서 빈둥거리고 논다'라고 수군거릴 게 뻔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늙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일하시는데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때는 퇴비로 썩힐 풀짐을 져내야 했고 겨울엔 땔감 나무를 해야 했다.

여럿이 산에 가서 같은 시간 동안 나무를 해도 내 나무 등짐은 늘 내 또래 다른 아이들 것보다 작았다. 낫질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나뭇짐 묶는 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서툴렀으며 지게질도 다른 친구들처럼 야무지지 못했다.

비탈길을 엉금엉금 내려오다가 돌부리에 그만 지게 목발이 걸려서 지게를 진 채로 발라당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때마다 쓰러진 지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서 얼크러지고 찌그러진 등짐을 다시 묶어야 했다. 가끔가다가 거들어주는 친구도 없지 않았지만 그건 '가물에 콩 나듯'이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게여
들판에는 아직 익어야 할 벼가 있는데
떠나간 집 담벼락에 기대어
너는 몸을 꺾고 쉬는구나

우리들 따뜻했던 등이여

- 이상국 시 '지게' 전문(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 비평사·1998 ))

다른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홀로 뒤처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마음이 초조했는지 바지에다 오줌이라도 지릴 지경이었다. 앞서 간 일행을 부지런히 뒤쫓아가지만 일행은 벌써 길 모퉁이를 돌아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음 속에선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일고 난 또다시 걸음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눈 오는 날이나 산자락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을 적에도 나의 나무꾼 노릇엔 휴식이 없었다. 가내미 뒷산이나 안산으로 가서 빼빼 마른 소나무 삭정이로 한 동을 만들어 오거나 솔잎을 긁어 빵빵하게 '가리나무' 한 동을 만들어 내려와야 했다. 눈이 아주 많이 쌓여 있을 적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생솔가지만으로 얼른 한 짐을 만들어 내려오기도 했다.

내려오는 눈길은 또 얼마나 미끄러웠던가. 끄떡하면 미끄러졌고 그때마다 엉덩방아를 찧곤 했다. 그렇게 서툰 나무꾼 노릇으로 겨울 방학 한철을 나면 손등은 새까맣게 때가 달라붙어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그 틈새에선 피가 찍찍 흐른다. 운이 나쁘면 귓바퀴에 얼음이 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게와 씨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내가 정작 나무꾼들이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신세타령 노래인 '어사용'을 알게 된 것은 서른 중반을 넘어서였다.

노동하는 삶이 가장 정직한 삶이다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쉽게 지게꾼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부두가 하역 작업 같은 데서는 아직도 지게를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마지막으로 지게꾼을 만난 때는 몇 년 전 속리산 등산길에서였다. 지게 위에는 해발 1054m 높이의 문장대에 있는 매점에 갖다줄 라면 몇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거의 맨몸인데도 낑낑대며 산길을 올라가는 나의 숨소리는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숨소리는 문장대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지게는 따로 분리된 도구가 아니라 자기 몸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이 겨레가 생긴 이래 지게는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아무리 버거울지라도, 아무리 혹심한 눈보라일지라도 결코 내동댕이쳐버릴 수 없었던 겨레의 삶 그 자체였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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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 심호택 시 '똥지게' 전문 <하늘밥도둑>( 창작과 비평사·1992)

그러나 우리 부모들은 애써 지게를 자신들의 기억 밖으로 추방하고 싶어했다. 자신의 고난을 결코 자식에게까지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만 놓고 보면 우리 부모들이 저지른 대가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다.

하지만 "공부 안 하면 똥지게 진다"라고 겁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을 자주 듣고 자란 까닭에 우리는 은연중 노동을 꺼리고 경시하는 풍조에 물들어버렸는지 모른다. 우리 부모들은 대신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너도 한 번 지게를 져 봐라. 이 세상에 노동만큼 정직한 건 없단다. 똥지게를 져 본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절대 부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밥을 먹든, 제아무리 시절이 변했다고 한들 A자 놓고 지게를 몰라서는 안 된다. 지게 속에는 우리 조상의 고난의 역사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태그:#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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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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