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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이 영롱하다. 9월이 열리면서 쨍쨍하던 햇볕도 많이 누그러졌다. 들판의 색깔이 바뀌고 있다. 나락 모가지가 올라온 논에 어느새 누런빛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공기도 많이 맑아졌다.

 

요즘 농촌은 오곡백과가 탐스럽게 여물어가고 있다. 지금은 붉게 물든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느라 한창 바쁘다. 채마밭에는 배추모를 옮겨 심고 무, 순무, 총각무를 비롯하여 쪽파, 갓씨를 넣고 있다. 농부들은 결실을 바라보며, 또 가을김장을 준비하고 있다.

 

사람 먹을 것은 남겨둘까?

 

오후 늦은 시간, 우리 마당 앞에 난데없는 소리가 들린다. 이웃 할머니가 바쁜 걸음으로 수수밭에서 비둘기를 쫒고 계신다.

 

"워이! 워이!"

 

할머니가 지르는 소리에 비둘기 대여섯 마리가 냅다 날갯짓을 한다.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녀석들이 얄밉기 그지없다.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할머니께 다가갔다.

 

"할머니, 비둘기 떼가 너무 많죠?"

"녀석들 지독하네. 이러다 사람 먹을 것도 안 남기겠어! 선생님네 수수는 괜찮아?"

"우리 것이라고 그냥 놔두겠어요. 쭉정이가 많아요."

"녀석들 만날 지킬 수도 없고, 원수네 원수!"

 

 

할머니는 날짐승 떼가 수수 알갱이 까먹는 재주는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애써 가꿔놓은 것을 비둘기한테 죄다 선물하는 것 같다며 혀를 끌끌 차신다.

 

농사일은 참 힘들다. 씨 뿌려놓으면 저절로 크는 것 같아도 수차례 손이 가야한다. 김매주고, 벌레나 병에 시달리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날짐승까지 날아다니며 농사꾼을 힘들게 하고 있다. 고라니는 새싹을 뜯어먹어 애를 먹이고, 각종 날짐승들은 애써 가꿔놓은 농작물을 가만 놔두지를 않는다.

 

특히 비둘기는 더 얄밉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가 농부들에게는 원수가 되었다. 녀석들은 콩이며 땅콩 싹이 올라올 때 파먹는데 선수이다. 과일이 익어갈 무렵에는 생채기를 내어 상품가치를 떨어뜨린다.

 

양파자루가 수수밭에 등장하다

 

 

거기다 막 여물기 시작한 수수까지 다 까먹어가고 있으니 당해낼 재주가 없다. 하는 수 없어 농부들 중에는 수수 모가지에 양파자루를 뒤집어 씌워놓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할머니! 면사무소 앞 수수밭에는 양파자루를 씌웠던데요?"

"그렇게 하면 비둘기 피해는 막지! 그런데 무슨 수로 이 많은 것을 씌워!"

"수수는 키가 커서 씌우는 것도 만만찮겠어요?"

"그럼! 뭐 쉬운 일이 있나?"

 

수수 모가지에 양파자루를 씌우는 일도 쉽지 않다. 양파자루도 수월찮게 들어간다. 수수 모가지를 서너 개씩 모아 한 자루에 뒤집어씌운다. 키다리 수수를 조심스럽게 휘어가며 꽤 많은 품을 들여야 한다.

 

수수밭에 등장한 양파자루. 빨간색과 초록색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수수가 빨간 고깔, 파란 고깔을 쓴 것 같았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꾸민 것치고는 푸른 하늘에 색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수수밭에 양파자루가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마 내가 어렸을 적에는 없었던 것 같다. 허수아비를 세워두기는 했지만 이처럼 수수알갱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날짐승으로부터 애써 가꾼 곡식을 지키려는 지혜이다. 대책 없이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의 욕심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날짐승도 자연의 일부인데 아무리 사람이 가꾼 곡식이지만 어찌 혼자 다 먹으려하는 걸까? 햇살과 바람과 하늘이 내려준 비, 그리고 벌과 나비와 같은 자연의 조화로 가꾸어진 합작품이 아니던가!

 

내 텃밭에 곡식을 심어놓았다고 해서 사람만이 독차지할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짐승들과 함께 나눠먹을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이 아쉽다.

 

수숫대의 기억이 새롭다

 

밭일을 마친 할머니가 우리 마당에 들어오신다. 시원한 물이나 한 컵 달라신다. 할머니 손에는 비둘기가 꺾어놓은 수수가 들려있다.

 

"털어낸 수숫대로 빗자루 만들어 쓴 거 알아?"

"그럼요! 우리 아버지는 손수 빗자루를 매셨는걸요."

 

할머니는 수숫대 빗자루를 아는 것을 보니 나더러 옛날 사람이라며 좋아하신다. 할머니와 나는 수수에 대한 이야기보따리 늘어놓았다.

 

 

나도 키다리 수수에 대해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수수는 쌀을 아껴먹기 위해 재배한 작물이었다. 특히, 수수로 팥떡을 해먹으면 색다른 맛이 있었다. 수수는 식량으로도 귀한 작물이지만 버릴 게 하나 없었다.

 

수수를 털어내고 남은 것으로는 빗자루를 만들어 썼다. 마당을 쓸면 고운 흙과 함께 정갈하게 쓸렸다. 수숫대 빗자루는 가벼운데다 지금 나온 플라스틱 빗자루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숫대는 살림살이 여러 부분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김장철이 되면 우물가에 깔아놓고, 그 위에 절인 배추를 씻어놓으면 물기가 잘 빠졌다. 그뿐이 아니다. 수숫대를 엮어 칸막이를 하고 골방에 고구마를 쌓아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러고도 남는 것은 잘 말려 땔감으로 썼다.

 

또 어릴 적 만만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수숫대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무더기로 쌓여있던 수숫대 더미에 숨어들어 숨바꼭질하던 추억이 생각난다. 겉껍질을 벗겨내고 하얀 속살로 만든 수수깡 안경으로 멋진 폼을 잡았던 기억은 또 어떤가? 수수깡을 갖고 놀다 날카로운 겉껍질에 손을 베어 피를 뚝뚝 흘렸던 기억은 다음세대는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평상에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신다.

 

"선생님네 수수 남아나면 우리 방아 찧을 때 같이 찧자고!"

"많지도 않은데다 날짐승이 그냥 놔둘지 모르겠네요."

"녀석들도 양심이 있으면 다 먹기야 하겠어!"

"양심이요?"

 

내 되묻는 말에 할머니가 웃으신다. 비둘기 떼를 쫒을 때보다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태그:#수수, #수숫대, #수숫대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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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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