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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 벗었습니다. 좀 선정적이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판매고 좀 올려보려는 마음으로 '누드'라는 이름을 달고 판매대에 올렸습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분홍빛 조명등이 비추는 윈도우 앞에 올라선 직업여성이 된 듯한 기분도 들지만 꿀릴 것 없는 떳떳한 마음이기에 눈길 좀 끌어보려고 '누드'가 되어 거리로 나섰습니다.

 

완·전·미 누드 쌀

 

25일, 진천 농다리축제 현장에 누드쌀이 등장했습니다. 인간들에게만 누드가 있는 가 했더니 이젠 농산물에조차 누드가 등장합니다. 일반 쌀들에 비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가가 궁금해지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방아를 찔 때(정미) 껍질을 더 많이 벗겼다는 건지 아니면 어떤 특수한 처리를 했다는 건지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습니다. 품질에 대한 자신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몸매에 자신이 있어야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될 수 있듯이 쌀 맛에서만큼은 자신이 있기에 그 맛을 배짱으로 누드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치마길이가 짧아지며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보다 훨씬 뽀얀 쌀들이 통통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전국 으뜸 농산물 품평대회 식미검사에서 대통령상을 3회씩이나 수상하였다는 고품질 쌀, 진천에서 생산되는 쌀이 '누드쌀'이라는 품명으로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벗어던지고 무엇을 드러냈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 자체만으로 눈길을 끄는 건 분명합니다.

 

농다리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농다리 위로는 농심이 건너갑니다.
농다리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농다리 위로는 농심이 건너갑니다. ⓒ 임윤수

행사장에는 누드쌀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농촌사람들이 돋구어내는 흥과 농심도 있었습니다. 신나는 풍물소리를 선두로 진천사람들의 농심이 축제장으로 들어섭니다. 알록달록한 종이꽃으로 장식한 하얀 고깔을 쓴 풍물패가 산천이 들썩하도록 농악을 울리며 들어섭니다.

 

흥겨운 풍물소리에 할아버지 어깨가 들썩

 

신명에는 남녀노소가 없나 봅니다.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풍물소리가 들리고, 팔 끝을 움찍거리게 하는 날나리소리가 울려 퍼지니 산천초목도 신나 보입니다.

 

춤을 춥니다.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돌덩이도 녹일 것 같은 쨍쨍한 폭양이지만 이런 햇살쯤 아랑곳 없다는 듯 할아버지의 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날나리소리가 들려오면서 시작되었던 할아버지의 춤입니다.

 

사고가 염려되어 '할아버지 괜찮으세요?'하고 참견 아닌 참견을 해야 할 정도로 날씨는 뜨거웠고, 할아버지는 신명나 있었습니다. 무대에서는 출연자들이 바뀌어도 할아버지의 팔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젊어서 한 가닥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조씨 할아버지(85·조중양)는 곱게 늙어가고 있는 촌로로 보였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다시 한 번 '힘들지 않으세요?'하고 여쭈니, '힘 안 들어, 좋기만 한 걸'하시며 환하게 웃으십니다.

 

얇은 모시적삼에 살짝살짝 비추는 할아버지의 팔다리는 야위어 있었고,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있지만 움푹 들어간 양쪽 볼에서는 할아버지가 보낸 농부의 삶이 보였습니다.

 

마당놀이라도 하듯 쿵다닥 거리는 풍악놀이가 한마당을 끝냈습니다. 풍물을 앞세운 농악대가 농다리를 건너갑니다. 흐르는 물과 돌다리, 돌다리를 건너고 있는 풍물패들이 농다리에서 어울립니다. 길게 늘어선 풍물패들이 풍년농사를 기원합니다. 돌다리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쨍쨍한 하늘로는 풍악소리가 퍼졌습니다.

 

도리깨질과 키질로 지내는 기우제

 

농다리 한쪽에선 기우제가 치러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풍년농사를 가늠하는 건 역시 하늘이며 우량입니다. 비가 너무 와도 안 되지만 가뭄이라도 들면 비를 내려달라고 올리던 게 기우젭니다.

 

지금이야 농지정리도 잘 돼 있고, 수리시설도 잘 돼 있을 뿐 아니라 인공비까지 내리게 할 수 있는 세상이니 비를 내려달라고 치성을 올리는 게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우리들의 정서, 가뭄이 들면 농부들이 기대고 싶은 풍습입니다.

 

진천 농다리에서 지내는 기우제는 별났습니다. 그동안 보아왔던 기우제는 명산대천을 찾아가 제물을 올리고 치성을 드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물에다 도리깨질을 하고 키질을 하였습니다.

 

웅덩이에 들어선 남정네들이 휙휙 도리깨를 돌려가며 물을 튀기면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낙들은 키질을 합니다. 기우제를 지냄으로 비가 왔는지 안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부의 마음, 단비를 기다리는 농부들의 간절함이 땀방울로 되어 떨어집니다.

 

농촌은 멸하지 않아, 다만 힘들어질 뿐이지

 

풍악소리가 멈추니 할아버지의 춤도 멈췄습니다. 할아버지도 햇살을 피해 차일 아래로 들어섭니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할아버지께서는 농촌의 앞날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느냐고 여쭤봤습니다.

 

할아버지의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농촌은 멸하지 않아, 다만 힘들어질 뿐이야. 제깟 것들이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지. 당장이야 힘들고 어렵지만 질경이보다 질기고 목숨보다도 모진 게 농심여. 천심이 있으면 민심이 있고, 민심이 있으면 농심도 살아날 겨. 내 말이 틀려?"

 

"젊은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진 찍으러 왔으면 열심히 사진이나 찍어"하시며 툭하고 어깨를 두드립니다. 축제의 장에는 누드쌀만 등장했는가 했더니 어디에 내놔도 당당한 농심, 홀딱 벗겨놔도 당당하기만한 농심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할아버지의 말마따나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농촌이나 농심이 멸하지는 않겠지만, '다만 힘들어질 뿐이지'라고 표현하신 그 힘이 얼마나 들지가 걱정입니다.


#누드#진천#농다리#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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