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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다른 병기를 들고 있는 구룡의 부조형상 자체만으로도 마주 서 있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부조된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무형의 압박감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다. 심호흡을 하면서 진기를 끌어올려 버티고 있음에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벌써 무릎을 꿇고 싶은 것을 지공과 손번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서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 구룡은 이름만으로도 무림인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사라진지 이십칠 년이 흘렀어도 식은땀을 흘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수백 년간 계속되어온 무림의 질서를 단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단숨에 무림의 주인으로 우뚝 섰던 바로 그들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공과 손번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자세였다.

만약 살아생전 구룡이 저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자신과 마주쳐 있었다면 자신은 공격도, 그렇다고 수비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저 당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형상만으로 치명적인 내상을 입힐 수 잇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공과 손번의 내공수위가 약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피를 토했을 터였다.

구룡의 형상이 왜 운중보 안에.... 그것도 생사림으로 통하는 지하에 있는 것인지 따위의 의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보다는 두려움이 왈칵 솟구쳐 올라 빨리 이곳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온통 맴돌고 있었다.

‘그저 조각일 뿐이다.....!’

애써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지만 단지 부조된 형상만으로 자신들을 압도하는 모습에, 그리고 단지 형상에 압도당한 자신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반발심에 진기를 더욱 끌어올려 굳어있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자 했다.

‘헉......!“

헌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뭔가 끈적끈적한 기운이 자신들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부드럽게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게 도대체....무슨 기운이지? 사술(邪術)인가?’

손번이 당황스런 눈빛을 지공에게 보냈다. 지공 역시 마찬가지 당혹스런 눈빛이었다. 이것은 단지 느낌이 아니었다. 구룡의 형상에 의한 무형의 기운도 아니었다. 이것은 실제 피부에 느껴지고 그들의 진력을 제어하는 실질적인 암력(暗力)이었다.

움직이려 할수록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는 무형의 기운도 강해지는 것 같았다. 지공과 손번은 최대한으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쨔쨕---! 쨕---!

뭔가 조그만 물체가 앞을 스쳐지나가는 느낌과 함께 그들의 뺨에서 마찰음이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은 뭔지도 모르는 가운데 뺨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꼈다. 아마 이를 악물고 있지 않았다면 이빨 몇 대는 족히 나갔을 것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어떤 놈이냐!”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는 무형의 기운을 벗어나며 수비 자세를 황급히 취했다. 헌데 이상한 것이 뺨을 맞는 순간 자신들을 옭아매던 무형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아주 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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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비록 허명뿐인 소림이지만 장경각의 각주인 각원선사를 무시할 인물은 아직 없다. 좌등 역시 경시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아직 술기운이 몸의 혈관을 타고 도는 지금에서는 더욱 그랬다.

“후배 된 도리로서 한 수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좌등이 정중하게 동자배불의 자세를 취하며 먼저 예를 취했다. 각원선사 역시 황급히 좌등에게 예를 취하며 팔목에 감고 있던 염주를 풀어 손에 쥐었다. 각원선사의 병기는 곧 저 염주였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도검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는 대추알만한 크기의 알이 모두 백팔 개.

“가르침은 오히려 노납이 청해야 할 판.... 어찌 중원 십팔만리를 진동하는 무적신창의 위명에 비하겠소.”

각원선사의 말은 그저 허식이 아니었다. 좌등의 신위는 이미 광나한과의 비무에서도 보았던 터. 예는 끝났다. 이제 승부만 남았을 뿐. 헌데 그 때였다. 돌연 그들이 머물던 방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열 개 중에 세 개가 사라졌으면 정신을 차리고 자중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자존심 타령이라니.....?”

긴장감 속에 고요하던 장내에 갑자기 구정물이라도 쏟아 붓는 독설이었다. 목소리에는 조소와 경멸스런 기색과 함께 노기가 섞여있었다. 화산과 소림의 인물들 얼굴색이 홱 변했다. 열 개 중에 세 개가 사라졌다는 말은 구파일방이 육파일방이 되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육파일방의 기세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대놓고 비하하며 말하는 인물은 없었다. 더구나 자신들이 나온 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은 방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게다가 아주 파렴치하고 못된 짓을 하는 화산의 늙은 원숭이는 어떻고....? 허울 좋은 육파일방이라고는 하나 동료라 할 수 있는 타문파의 장로를 반죽음 시켜놓고...... 그것도 모르고 늙은 원숭이의 충동질에 나서는 늙은 중이나.....”

욕설보다 더 심한 독설이었다. 화산의 장문인을 ‘늙은 원숭이’라 하든가, 소림의 장경각주를 ‘늙은 중’이라 대놓고 말할 인물이 중원에 있었던가?

“어떤 놈이냐?”

아니나 다를까? 화산의 자하진인이 호통을 쳤다. 목소리에 진력이 실려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막이 윙윙거리고, 열려진 문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미 진력이 실린 음성만으로도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허나 상대는 주눅들 인간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원숭이처럼 꽥꽥댈 필요 없어..... 당신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잠시 후에 나서라구.... 물론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비열하고 파렴치한 짓거리였는지 덜컥 겁은 나겠지만 말이야....”

오히려 더 비아냥거리고 경멸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과 함께 문밖으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이미 좌등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능효봉임을 알았다. 하지만 무슨 배짱으로 화산의 장문보고 대놓고 원숭이 운운 내지는 소림 각원선사를 늙은 중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 놈---!”

능효봉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화산 칠검 중 서열 두 번째인 탁매검(倬梅劍) 장유(張喩)가 노기 띤 음성을 발하며 누가 제지 할 새 없이 능효봉을 향해 쏘아갔다.

번쩍----!

어둠을 가르며 한줄기 검광이 허공에 가르는 순간 커다한 매화송이가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너울거리는가 싶더니 능효봉의 전신을 덮으며 내리꽂혔다. 커다란 매화 한 송이는 곧 장유의 명호 그대로였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능효봉의 전신을 발기발기 찢을 것 같았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능효봉은 그 매화 한 송이 속에 갇혀 곧 피를 부릴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 안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팔을 두어 번 휘두르자 매화 송이를 이루고 있던 꽃잎 하나하나가 분리되며 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매화꽃이 지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타닥---!

동시에 오히려 쏘아갔던 탁매검 장유의 신형이 용수철에 튕기듯 빠르게 튕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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