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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방학 내내 고향 보리소골에 가 있었습니다. 보리소골은 그야말로 별천지였습니다. 하루종일 우리 식구들 빼곤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곳이지만, 시간 차이를 두고 피어나는 나리꽃, 패랭이, 달맞이꽃이 피어났습니다. 잠자리도 여름이 깊자 제 세상을 만난 듯 허공을 좁다고 날아다녔습니다. 사람이 없는 대신 꽃과 나무와 온갖 생명들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요.

나와 아내, 늦둥이 진형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보낸 행복한 방학 기간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진형이 녀석은 늦잠을 자고, 마당가에서 모래 장난을 하다가, 그도 지친 오후쯤이면 개울에 나가 돌무더기로 댐을 만들고, 물장난을 하며 놀았습니다.

아내와 나는 아침이면 커피를 한 잔 타 들고, 등나무 그늘이 우거진 마당가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결혼하고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아오면서 가장 편안하고 많은 이야기를 우리 부부는 이번 방학 동안 나눈 것 같습니다.

▲ 패랭이 꽃 진 자리에 잠자리가 앉아 여름이 깊었음을 알려주는 보리소골
ⓒ 최성수
방학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였습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자 진형이 녀석이 상 위에 앉아 정신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라 또 그림을 그리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닙니까?

"우리 꼬맹이가 뭘 이렇게 열심히 쓴다냐?"

내 물음에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방학 과제인데요, 동화를 쓰고 있어요, 보리소골 개울에 살던 버들치 이야기예요."

보리소골 집 앞 작은 개울에는 버들치 떼가 여러 마리 살고 있습니다. 제법 큰 녀석들 몇 마리가 눈에 띄더니, 방학 때 갔더니 큰 녀석들은 돌 틈으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밥알처럼 조그만 새끼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이것 봐요, 버들치들이 내 발가락을 간지럽혀요."
"우와, 도망도 안 가."

아내와 진형이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허리를 굽혀 버들치 새끼들이 발가락 사이에서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신기한 듯 보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 손때를 타지 않은 계곡에 사는 물고기라 사람이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

방학 숙제로 여러 과제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하는 것이 있는데, 진형이가 고른 것이 바로 동화 쓰기였답니다. 녀석은 보리소골에서의 경험을 동화로 쓰겠다는 마음을 먹고, 하루종일 글을 썼다는 겁니다.

"다 썼다."

진형이가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부르더니, 내게 공책을 내밀었습니다. 녀석이 내민 공책에는 이런 동화가 한 편 담겨 있었습니다.

▲ 꽃망울 터질듯한 나리꽃에도 잠자리는 앉아 햇살을 즐긴다.
ⓒ 최성수
제목 : 꼬마 버들치 날쌘이의 모험
- 최진형

제1장 날쌘이의 탄생

어느 따뜻한 봄날에 버들치 부부가 알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 버들치는 버들이, 아빠 버들치는 검은 바람이었다. 버들치 부부는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첫 번째 알이 깨어지면서 알 속에서 꽤 크고 튼튼해 보이는 버들치 한 마리가 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새끼들이 많이 태어났다. 하지만 마지막 제일 작은 알 하나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여보, 막내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예요?"
"곧 나오겠지. 기다려 봅시다."

마침내 마지막 알이 깨어났다. 그런데 그 알을 깨고 나온 버들치는 매우 빨랐다. 버들치 부부는 막내 이름을 날쌘이라고 지었다.

제2장 버들이의 죽음

날씨가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버들치들이 사는 계곡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날쌘이는 부쩍 컸지만 형과 누나들처럼 튼튼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버들치 부부는 왜가리를 만났다. 왜가리의 이름은 얼룩이였다. 얼룩이는 날쌘이를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버들치 부부가 저항하는 바람에 두 번째 공격을 해야만 했다. 날쌘이를 노리던 공격이 몇 번이고 실패하자 얼룩이는 엄마 버들치에게 공격을 시작했다. 결국 버들이는 얼룩이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검은 바람은 얼룩이가 버들이를 공격할 때 큰 상처를 입었다. 검은 바람은 날쌘이 때문에 버들이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날쌘이를 외면했다.

제3장 홍수

여름이 깊어가면서 비가 쏟아졌다. 날쌘이는 외로웠다. 아빠도 날쌘이를 외면했다. 오직 날쌘이를 보살펴 준 버들치는 반짝이는 눈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나뿐이었다. 반짝이는 눈은 날쌘이를 위로해 주기도 했다.

"속상해 하지 마. 엄마가 돌아가신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누나가 위로했지만 그래도 날쌘이의 마음은 예전 같아지지 않았다. 사흘 동안 비가 많이 내렸다. 계속 내려서 물이 너무 많아졌고. 물풀이 물살에 휩쓸렸다. 오일째 되는 날 홍수가 일어나서 거의 많은 버들치 가족들이 돌에 찧고 물에 휩쓸리고 물거품에 휩쓸려 죽었다.

검은 바람은 도망가고 반짝이는 눈은 사라져 버렸고, 날쌘이는 도망치다 어느 개울에 다다르게 되었다.

제4장 모험의 시작

날쌘이는 아빠가 보고 싶고 반짝이는 눈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개울에 혼자서 가만히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모험을 하기로 했다. 날쌘이는 헤엄을 쳐서 북으로 계속 갔다. 너무 멀어서 잠을 자기도 했고 먹이도 혼자 구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매우 힘들었지만, 혼자 방법을 터득하니 쉬워졌다. '재미있기도 한 걸.'

제5장 새 친구와 반짝이는 눈과의 만남

날쌘이는 북으로 계속 갔다. 어느 날 어떤 협곡을 지나는데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냐?"

조그만 가재가 발을 딸깍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난 날쌘이야. 아빠를 찾아 북으로 가고 있어."
"난 붉은 발이야."

가재가 부드럽게 바꾸며 말했다.

"나도 북으로 가야 돼. 모래로 이루어진 섬을 찾으러 가고 있지."
"같이 가자."

둘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풀 속에서 반짝이는 눈을 만났다. 날쌘이는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어떻게 여기에…."
"여기에 있으면 너를 만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어."

세 일행은 북으로 계속 갔다.

제6장 새로운 터전

셋은 계속 북으로 갔다. 붉은 발이 지칠 때면 날쌘이와 반짝이는 눈은 속도를 늦추어 주었다. 그곳은 상류여서 물살이 매우 빨랐다.

어느 날 작은 개울을 발견했는데, 왼쪽에 모래톱이 있고 오른쪽에는 흙이 있고, 가운데에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 돌무더기는 꽤 넓고 높았다. 그래도 맨 아래쪽은 물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모래톱에서 게 몇 마리가 나와 말을 걸었다.

"뭐야?"
"적인가?"
"전투태세를 갖춰라."
"아니, 아니 내가 말을 걸게."

드디어 게 한 마리가 말을 걸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는 날쌘이와 반짝이는 눈, 그리고 붉은 발이야. 우리는 아빠 버들치를 찾아서 북으로 가는 길이야."
"처음 보는군. 만나서 반갑소."
"우리도."

게들과 친해진 뒤 그들은 새 터전을 마련했다. 가운데 있는 돌무더기에 집을 마련했는데, 날쌘이와 반짝이는 눈은 물속의 가장 낮은 돌 아랫부분에 집을 지었다.

며칠 뒤 그들은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아빠를 찾아가야만 해요."
"우린 기다리고 있겠소."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오."

날쌘이와 반짝이는 눈은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제7장 아빠와의 만남

그들은 북으로 가다가 물살이 아주 심한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뻔했다.

어느 날 절벽 아래를 지나고 있는데 절벽 위에 왜가리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그 왜가리는 바로 버들이를 잡아먹은 얼룩이였다. 그들은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했다. 얼룩이는 날쌘이와 반짝이는 눈을 보며 말했다.

"좋은 먹잇감이군."

그 말을 듣고 날쌘이가 큰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쉽게 잡아먹히지는 않을 거야."

얼룩이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그래봤자 너희들은 내 밥이야."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버들치 일행은 오분도 채 지나기 전에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날쌘의 머리에 어떤 생각 하나가 휙 스쳐 지나갔다.

"물을 뿌려서 물리쳐라."

날쌘이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마구 움직여 물을 튀겼다. 그들을 잡으려고 매우 낮게 날고 있던 얼룩이 눈에 물이 튀어 들어갔다. 얼룩이는 툴툴거리며 날아가고 말았다. 그때 돌에 숨어 있던 아빠가 나타났다.

"아빠."
"얘들아."
"아빠 보고 싶었어요."

아빠는 늙고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들은 아빠와 함께 개울을 내려갔다. 개울 곳곳에는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들은 안간힘을 쓰며 물살에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서 내려갔다.

드디어 돌무더기 모래톱이 보였다. 수많은 게들과 붉은 발이 환영해 주었다. 날쌘이는 옛날의 어린 버들치가 아니었다. 몸집은 커졌고 힘도 매우 세졌다. 이제 날쌘이는 늙은 아빠와 누나를 지킬 줄 아는 의젓한 버들치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무지개가 빛났다.


▲ 방학 초기, 감자를 캐는 진형이의 모습. 제 꿈도 저렇게 캐냈으면 좋겠다.
ⓒ 최성수
군데군데 어색한 표현들과 줄거리가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늦둥이 녀석이 처음 쓴 동화니 내게는 그 동화가 다른 어떤 작가의 동화보다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니 아이를 방학 때 학원도 안 보내고, 공부도 안 시키고 어쩌려고 그래?"

어떤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보고 그런 질책에 가까운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냥 빙긋 웃고 말지만, 내심으로는 아이가 행복한 게 우선이지요, 하는 대답을 합니다.

▲ 이제는 가을 꽃 산비장이가 피어 여름이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산비장이에 앉은 나비의 날개짓에도 보리소골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 최성수
늦둥이는 우리 부부에게는 특히 더 소중한 아이입니다. 큰아이를 낳고 터울이 지게 둘째를 낳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제가 교육운동과 관련해 해직이 되었지요. 먹고 살 일이 막막해 아이를 갖지 않고 있다가 복직이 된 후 둘째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큰아이와 열두 살 터울이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복직 기념인 셈입니다.

늦게 낳은 아이라서 그런지, 아이의 행복이 곧 우리 부부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말 보리소골에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는 아예 서울보다 시골을 더 좋아합니다. 꽃 이름도 나무 이름도 제법 많이 알고요. 때로 꽃이나 나무 이름을 주워섬길 때면 오물거리는 그 입이 그대로 꽃이나 나무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답니다.

나는 녀석이 쓴 동화를 읽으며, 그래 공부는 좀 못해도 좋다, 지금처럼 순한 마음으로 꽃과 나무 같은, 아니 네 동화 속에 나오는 꼬마 버들치 같은 생명들을 소중히 여기는 따스한 마음만 있으면 네가 살아갈 날들이 다 행복할 거야, 하는 믿음을 가집니다. 우리 늦둥이의 동화 <꼬마 버들치 날쌘이의 모험> 재미있으신가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비롯한 저의 글들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보리소골#버들치#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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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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