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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르르----

탁자에 올려진 담자의 옥로주가 바닥이 났다. 거의 닷 근의 옥로주를 마신 셈이다. 화산의 인물들은 그저 시늉만 냈으니 좌등이 세 근 이상을 혼자 마셨다는 결론이다.

“영웅은 두주불사(斗酒不辭)라..... 신창의 주량은 정말 놀랍구려. 술이 세다는 사람들도 옥로주 한 근 정도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말은 그리 하면서도 자하진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좌등이 독한 옥로주를 저렇게 거리낌 없이 마셔대고 있다는 것은 곧 좌등을 오늘밤 이 자리에 붙잡아 놓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임무나 역할을 순조롭게 해낼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화산의 옥로주는 향도 향이지만 마실수록 감칠맛이 돌아 취하지 않고는 멈출 수가 없소이다.”

좌등의 혀는 약간 꼬여 있었다. 이미 취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아직 동공은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좌등의 주량에 모두들 내심 탄복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진운청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제 가져온 옥로주가 얼마나 남았느냐?”

남은 것 모두 가져오라는 말이다. 자하진인의 물음에 황용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두세 근 정도는 남았을 거예요.”

그러자 좌등이 손을 홰홰 저었다.

“아니오.... 옥로주를 동 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가봐야 할 것 같소이다.”

좌등의 갑작스러운 말에 자하진인의 얼굴색이 홱 변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소림의 각원선사나 지광의 눈에는 미세하나마 일말의 기대감이 떠올랐다.

“이리 취하시고 어찌 가신단 말씀이오?”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하진인이 안 될 말이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미 서로의 목적은 알고 있다. 좌등이 가고자 한다면 어쩔 수없이 드잡이 질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맨 정신에도 눌러앉아 있었는데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자신들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혹시나 술김에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뜻도 담겨있다.

“허허... 나 역시 눌러 앉아 술을 더 마시고 싶지만 나를 데리러 온 사람들이 있으니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소?”

좌등의 말에 자하진인은 아차 싶었다. 그런 것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청각을 최대한 높이며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은 없었다. 좌등이 헛소리 한 것일까? 자하진인이 알고 있는 한 좌등은 헛소리를 지껄일 인물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가신다면 그 결과를 생각해 보셨소?”

말을 하면서 각원선사 쪽으로 시선을 힐끗 던졌다. 각원선사를 충동질하는 모습이었는데 딱딱하게 굳은 각원선사의 얼굴에는 뻔히 자하진인의 의도를 알면서도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음을 역력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게 문제요....”

좌등은 고개를 끄떡였다. 자하진인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좌등은 신중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말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진인께서 나선다면.....”

그 말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이어지는 다른 인물의 목소리로 대치되었다.

“이 자리에 살아있는 화산과 소림의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오.”

모습을 보인 인물은 뜻밖에도 창월이었다. 언제나 반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있던 창월은 다른 때와는 달리 고개를 반듯하게 쳐들고 있었고, 이국적인 그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자신감과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자하진인과 각원선사의 얼굴에 불쾌함과 노기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성곤과 관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자도 아닌 다음에야 감히 어디라고 종복이 나선단 말인가? 자하진인이 노기 띤 음성을 발했다.

“창월이라고 했던가? 자네 주인의 얼굴을 봐서 지금 한 말은 잊어버리겠네. 허나 또 한번 그런 말을 한다면 나중에 성곤께 사정 말씀을 드리더라도 더 이상 묵과하지는 않겠네.”

허나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호호호...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 분의 말은 사실이니까요....”

창월의 뒤로 나타난 인물은 삼합회의 회주인 궁단령과 남궁정, 그리고 귀비였다. 자하진인의 얼굴이 다시 또 급변했다.

‘그들이 실패했군.... 추태감이나 상만천도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삼합회는 분명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제거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세 사람이나 나타난 것이다. 자하진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화산의 인원은 자신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 소림 두 명이다. 상대는 좌등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 인원으로는 분명 우세이지만 좌등과 궁단령의 존재는 컸다. 더구나 오늘 오전에 보여준 남궁정의 무위는 화산의 제자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게다가 창월이란 저 인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성곤이 거두어들인 놈이니 절대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진운청 역시 특이한 것은 없어도 한몫은 충분히 해내는 인물이라고 들었다. 손을 쓰게 된다면 이기더라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하진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화산의 전력은 이 운중보를 떠날 때까지 그대로 보전해야 한다.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낸다는 것은 그들과 등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미 자신은 추태감과 상만천 쪽으로 선택을 했다.

깊이 발을 담그지 않는 선에서 타협도 보았다. 보주라는 존재가 너무 큰 변수라서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무소축이 날아가는 소리로 이미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헌데 삼합회의 회주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다.

‘약속은 그들이 먼저 어겼다.’

자하진인은 각원선사를 보았다. 여기에서의 결정은 자신이 하면 안 된다. 지금가지 그래왔듯이 소림을 내세워야 한다. 각원선사라고 비열한 자하진인의 심사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노납은 좌총관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 것이오.”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지만 자하진인도 더 이상 발을 빼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선택이오. 어찌 천년 소림이 역모(逆謀)의 주구가 되려 하시오?”

좌등이 눈에서 섬광을 발하며 각원선사를 직시했다. 그 눈빛은 절대 술에 취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꾸짖는 말투여서 각원선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미타불..... 그 무슨 말이오? 역모라니....”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시오? 지금 위충현이 이 나라의 기둥을 깎아먹는 쥐새끼라는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그의 주구인 추태감....! 그리고 상만천 역시 중원의 돈을 한 손에 거머쥐고 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아실 터이고 말이요.”

산문 안에 처박혀 있다한들 밖의 소식을 모르랴! 애써 떠도는 풍문일 뿐이라고 치부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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