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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 전경
평화박물관 전경 ⓒ 김대갑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천황이 있는 본토를 농락당할 수 없다며 발버둥을 쳐댔다. 점점 패색이 짙어가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일본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간악하면서도 추악한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군을 상대하자. 본토와 충분히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수행하여 본토를 다치지 않게 하자. 어차피 남의 땅이 아닌가. 본토만 지킬 수 있다면 남의 땅은 불바다가 되어도 상관이 없다. 하물며 조센징의 땅인데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런 전략에 의해 일제는 우리 민족의 보고인 '제주도'를 최후의 방어기지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제주도 전체를 군사 요새화하여 미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아직도 제주도 전역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는 '진지동굴'들이다. 일제가 우리 백성들을 야만적으로 동원하여 맨손과 곡괭이로만 파게 한 동굴이 바로 진지동굴인 것이다.

곡괭이
곡괭이 ⓒ 김대갑

현재 제주도에는 이런 진지동굴들이 어림잡아 700개에서 1600개까지 있다고 추정된다. 송악산, 추자도, 제주도 전역의 오름(산의 제주방언)들에서 발견된 수많은 진지동굴들. 그 동굴들을 직접 접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저 분노요, 한탄스러움이요, 애절한 통곡이다. 왜 하필이면 우리 민족이 이런 고초를 겪었는지 참 안타까울 뿐이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에 가면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 진지동굴이 박물관 형태로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일제의 만행을 다양한 서적과 사진, 유물들로 만천하에 알리고 있다. 그 곳은 '평화박물관'이다.

평화박물관은 영상관과 전시관을 갖춘 박물관 건물과 약 2km의 야외 진지동굴로 구성되어 있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선 관객은 우선 영상관에서 약 14분에 걸친 기록영상물을 보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일제의 전쟁 범죄를 사실 그대로 재현한 영상물이다.

이 영상물을 보고 난 후에 옆의 전시관에 가면 그 당시의 다양한 유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일본군의 전쟁 물품과 각종 측량 도구, 곡괭이, 서적들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진지동굴 입구
진지동굴 입구 ⓒ 김대갑

이 전시물 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쪽 날만 있는 곡괭이다. 좁은 동굴 안에서 효과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한쪽 날을 제거한 곡괭이는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던 제주도민들의 한을 대변하는 것이다.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이 곡괭이를 들고 제주도민들은 일본군의 동굴을 팠던 것이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싶어 사비로 박물관 건립

전시관의 후문을 나오면 바로 진지동굴로 가는 길이 나온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가마오름 진지동굴의 입구. 나무판자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입구 앞에 서니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절로 든다.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도 앞선다. 혹시 저 동굴 안에서 못 나오는 것이나 아닌지.

가혹한 수탈의 현장
가혹한 수탈의 현장 ⓒ 김대갑

동굴 안으로 살며시 들어가니 안이 너무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깊은 적막감.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나트륨 조명. 오렌지 색깔로 물든 나무판자 사이로 얕은 냉기가 흘러나온다. 어떻게 이런 동굴을 다 팠을까. 어떻게 이런 동굴을 곡괭이 하나로 다 팠을까. 가슴이 너무 아려온다.

그때 저 동굴 너머로 들려오는 우렁우렁한 목소리. 지긋한 연세의 박물관장님이 어서 오시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이 동굴의 유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신다. 동굴의 총 연장은 약 2km이며, 높이는 1.6m에서 2m정도이고 너비는 1.5m에서 3m라고 말씀하신다.

관장님은 자신의 아버님도 이 진지동굴에서 많은 고초를 겪은 분이라면서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싶어 사비를 들여 박물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형형함이 서려 있었다. 왜 그가 사비를 들여 이 박물관을 건립했는지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동굴 안에 전시된 모형들의 모습에서는 노동의 가혹함이 느껴지고, 편안한 책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일본군 사령관의 모습에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아, 빛이 보인다.
아, 빛이 보인다. ⓒ 김대갑

동굴 안은 의외로 넓어서 숙소와 회의실, 의무실 등이 비치되어 있으며 출입구는 약 10곳 정도라고 한다. 전체가 미로처럼 되어 있어 같은 출입구로 나온 적이 없다고 관장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느냐며 되물어온다. 다시 그의 눈에 비치는 분노의 그림자. 엄격함이 느껴지는 그 눈동자에는 사뭇 비장함이 서려 있다.

관장님의 설명을 들으며 동굴 안을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출구에서 스며 나오는 한 줄기 빛이 보인다. 현재까지 개방된 곳은 약 300m 정도.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진지동굴 탐험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 때, 동굴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은 저 빛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까. 햇살이 환하게 내리 꽂히는 바깥세상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이 모두가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잘못이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제의 야욕 탓이다.

열심히 설명하는 관장님
열심히 설명하는 관장님 ⓒ 김대갑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증거물들을 모아 여기에 박물관을 세운다.'

평화박물관 설립 취지가 새겨진 화강석 비를 잠시 일별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먼 후일, 일제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수많은 나라의 백성들에게 진지한 태도로 사죄의 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일본은 지구촌의 평화에 일조하는 나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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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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