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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10분만 앉아있으면 독재라는 말이 녹색혁명가로 바뀌지 않겠는가?"
ⓒ 오마이뉴스 권우성
"시청 앞 잔디광장에 단 10분만 앉아 있으면 독재라는 말이 녹색혁명가로 바뀌지 않겠느냐?(데일리안, 2005. 8. 18)" <인물과 사상>지에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대표 사업들인 뉴타운, 청계천복원, 시청 앞 잔디광장 등에 대해 연재했었는데, 나의 비판에 대한 이명박 시장 측 대변인의 반박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왜 비판하는가?'라는 논리다.

이런 반박 논리를 여러 공간을 대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전여옥 국회의원은 얼마 전 이명박 지지선언을 하면서 "청계천을 걷는 시민들의 행복한 얼굴이 눈에 보이는 정치적 결과고 그것을 보고 선택했다(데일리 서프라이즈, 2007. 7. 13)"라고 했던 바 있다. 인터넷 리플에도 이런 논리들이 많이 동원된다.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실제 시청 앞 잔디광장에 앉으면 좋다. 보기에도 눈이 시원하다. 사진발도 멋지다. 청계천의 빠르게 흘러가는 물가를 걸으면 도심의 복잡함을 잊을 수 있고 물장난 좋아하는 사람들이 텀벙거리면 기분 좋다. 이른바, '잘해 놨다'. 하기는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 때도 사람들이 그랬었다. "참 잘해놨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은 비판이고, 역시 잘해놨더라는 것이다. 지금의 1호선은 어떤 상태인가?

광채가 화려하다고 황금은 아니다. 시청 앞 잔디광장의 공공성에 대한 의문, 현재의 청계천을 복원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당히 공유되는 인식이다. 월드컵공원에 비해 관리 단가가 15배 든다는 잔디광장이고, 수자원공사를 통해 정화된 한강 물을 흘려보내면서도 물값을 면제받고 있는 청계천의 유지관리비는 연간 70억원(당초 계획 18억원)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시청 앞 잔디광장이나 청계천을 '녹색혁명'이라 부를 수는 없다. 당장 푸르다고 녹색혁명은 아닌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보리를 심어 푸르게 만들었다는 정주영 일화를 녹색혁명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스펙터클 중독의 공간정치

문제는, 화려한 광채에 현혹되는 시류다. 본질에 대한 건강한 의식을 가로막는 이 시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청계천이나 시청 앞 잔디광장은 우리 사회에 스펙터클 공간정치 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이명박 전 시장은 단연 스펙터클 공간정치의 원조라 할 만하다. 이명박 전 시장의 공(功)이라면 공간정치 마인드를 시정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고, 이명박 시장의 과(過)라면 스펙터클 공간정치화한 것일 터이다.

스펙터클 공간정치는 앞으로도 더욱 기승을 부릴 확률이 높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관객이 유혹되듯 스펙터클 도시공간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조감도가 신기해보이고, 신기루 같은 두바이에 감탄하고,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를 지어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여기는 식이다. 하지만 그 스펙터클 뒤에 숨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나.

이명박 전 시장의 스펙터클 공간정치가 너무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우려는 더 커진다. 실제 그러한 사례는 아주 많다. 지금도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지향하는 스펙터클 공간정치에 얼마나 많은 국민 세금이 낭비되고 있나. 또 그런 실적을 내라고 얼마나 많은 언론들이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있나.

예컨대, 언론은 오세훈 현 시장을 끊임없이 이명박 전 시장과 비교한다. 왜 아직 딱 부러질만한 실적을 내놓지 못하나 부추기는 식이다. 우리 도시에 강이 흐르지 않는 도시가 없는데, 지자체장들은 청계천의 아류 사업들을 경쟁적으로 내세운다. 그중 진정 '자연환경 복원'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제대로 추구되고 있을까. 임기 내에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완성해내라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압력은 과연 건강한 것인가.

예컨대, 서울시청은 우여곡절 끝에 올 9월에 신청사 착공을 앞두고 있는데, 바로 그 공간은 3년 전 아름드리 소나무를 들여 가꾸어 이명박 전 시장이 야심차게 개장했던 장소다. 이미 신청사 계획이 세워졌었건만 뭣 때문에 아까운 세금 들여 그 공간을 가꾸었을까?

시청 앞 잔디광장 개장 후 3년이 지난 지금, 오세훈 시장은 시청 앞 지하공간을 활용하는 전제로 이 공간을 다시 꾸밀 구상을 한다고 알려졌다(매일경제, 2007. 6. 18). 이명박 전 시장은 당초 지하공간까지 활용한 현상설계 당선 안을 취소하고 단기간 시공과 신속 개장이 가능한 잔디광장으로 바꿨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전 시장은 그의 임기 동안 급조성한 잔디광장으로 인기를 얻고, 오세훈 현 시장은 그의 임기 동안 지하까지 활용한 새로운 시청 앞 광장으로 인기를 얻게 될까?

▲ 청계천은 청계천 복원이 아니다: "청계천을 걷는 시민들의 행복한 얼굴이 눈에 보이는 정치적 결과고 그것을 보고 선택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청계천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될까? 유지관리 투자는 계속될까? 시멘트바닥의 이끼 현상, 강우 시 하수 유입으로 인한 수질 오염 논란, 최근 하수구의 쥐떼 출몰 등의 문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청계천의 진짜 복원은 언젠가는 가능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이번 대선 정국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사후 평가를 하고 원인 개선을 고민하게 될까?

공간정치에 대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자타 '환경시장'으로 불리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용산 미군기지의 공원화를 적극 주장하면서도 왜 한강 한가운데 있는 중지도 '노들섬'에는 이명박 전 시장이 추진했던 오페라하우스보다도 더 큰 복합문화콤플렉스를 짓고 싶어 할까?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는 어떤 르네상스를 말하는 걸까?

오랫동안 개발 대 보전의 쟁점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새만금의 미래에 대해서 해당 전북의 적극 개발 입장과 중앙정부 중재적 개발안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 전주시장으로서 전통문화 복원의 성과를 이룬 현 김완주 전북지사는 환경과 개발 사이에서 어떤 공간정치를 펼칠까?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공간정치의 함의 읽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정책은 과연 좋은 공간정치인가. 과연 지역균형발전의 핵으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성립되도록 추진되고 있는가. 10개의 지방도시에 조성되는 혁신도시는 과연 좋은 공간정치의 가치를 가졌을까? 과연 그 추구한 가치가 구현될 방식은 제대로 실행될 것인가? 수도권의 공공기관 이전은 차기 정부에서도 과연 제대로 이행될까 아니면 유야무야될까? 이전된 후의 공간들은 또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떠한 공간정치를 펼칠 것인가?

어떠한 가치의 공간정치냐

공간정치의 주제와 대상은 무한할 정도로 많다. 그만큼 뜨거운 주제다.

이 연재는 공간정치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통상 '정치'라는 단어가 붙으면 뭔가 나쁘다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간정치를 긍정적인 담론의 장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공간정치의 함의를 읽고 공간정치의 역학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래야 좋은 공간정치를 격려하고 나쁜 공간정치를 견제할 수 있다.

기실, 공간정치는 정치의 기본 주제 중 하나다. 공간은 중요한 사회 인프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경제를 담는 것도, 산업을 담는 것도, 일자리를 담는 것도, 삶터를 담는 것도, 관광을 담는 것도, 문화를 담는 것도, 지역균형을 담는 것도, 즐거움과 행복을 담는 것도 다 공간이다. 공간은 모든 국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관계되며, 공간은 '부동자산(不動資産)'이고, 한번 만들면 오래가는 '장기자산'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회 인프라다.

공간정치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공간정치를 한다. '개발 공약'은 전형적인 공간정치이고, 나쁘게만 여겨지는 이른바 '전시 행정'이라 것도 때로는 좋은 공간정치를 촉진하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 관건은, '어떠한 가치를 위한 공간정치냐'일 뿐이다. 광채에 환호하게 만드는 스펙터클을 만드는 데 치중하는 공간정치냐 아니면 좋은 공공 가치를 지향하는 공간정치냐, 쉽게 말하자면 나쁜 공간정치냐, 좋은 공간정치냐다.

'공공성'을 높이는 좋은 공간정치

하지만 공간정치란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나쁜 공간정치, 좋은 공간정치로 이분법 적으로 나누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업이 즐겨 쓰는 스펙터클 공간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자기 돈을 투자하여 멋진 공간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얼마큼 올리든 시장(市場)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자체를 비판할 수 있을까 하는 논리가 금방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넓혀서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용적률을 높여주거나 초고층 초호화 주상복합을 짓게 해주는 대신, 시민들이 쓸 수 있는 공원이나 시설을 내놓게 하는(이른바 기부채납) 사업 인허가'는 과연 좋은 공간정치일까? 특혜일까, 아니면 민간 이익과 공공 가치의 협상이라고 봐야 할까? 이런 과정에는 기업뿐 아니라 공공도 필수적으로 관여하는 공간정치이다. 실제 우리 도시 대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런 공간정치 과정에서 어떤 가치, 어떤 정책을 택해야 할 것인가.

공공 리더와 공공 부문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공간정치의 선택 과정에서 어떤 가치에 방점을 두고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느냐에 공공 부문의 중심 역할이 있고, 그 과정에서 공공 리더의 가치가 공간정치의 선택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이 무엇이냐, 공공 부문이 지켜야 할 공공성의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첨예한 이해관계가 득실거리는 시장 현장에서 어떻게 공공성의 원칙을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공공 부문, 공공 리더의 핵심 역할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스펙터클 공간정치는 앞으로도 더 극심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간을 이용한 신개발주의와 더불어 '녹색 정치, 어메니티 정치, 문화 정치' 등 자칫 겉모습에 치중한 정치도구가 경쟁적으로 펼쳐질 위험이 높다. '녹지라는 이름으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이라는 이름으로, 환경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는 스펙터클 중독 정치다. 자본력이 좌우하고, '민자 유치' 압력이 극심해지고, 양극화되는 시장 수요를 보더라도 자칫 스펙터클 공간정치화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스펙터클 중독 공간정치 시대에 좋은 공간정치의 원칙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 연재를 통해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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