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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는 백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무리 지혈을 해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척추를 가르고 흉측하게 벌어진 상처는 치료하기에는 너무 깊은 것이었다.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백도의 눈에 뿌연 이슬이 맺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백도에게도 감정이란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미안하다.... 지매(芝妹).... 너를 지켜주지 못했구나.”

부친의 장례식 때 자신을 찾아왔던 아이였다. 동창에 급박하게 쫓기면서도,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매달리던 아이였다. 동향 출신이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고, 굳이 관계라면 동창에 의해 살해된 부모를 둔 것일 뿐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회의 일부인 운중보에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도와달라고 했다. 자신들은 힘이 없어 몸을 팔아가며 복수를 하고 있지만 백도 당신에게는 힘이 있지 않느냐고.... 동림당원의 씨를 말린 위충현과 그 잔당들이 죽는 날까지 자신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위충현을 죽이지 못하고 죽을까봐 억울하다고 호소했던 아이였다.

백도가 회의 회주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사부라고 밝혔을 때도 그녀는 당당했다. 그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두려움이 없었다. 백도는 이미 그녀와 당화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친이 동림당에 관련되어 살해를 당한 이상 그 역시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 뒤로 백도는 그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

홍교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는 듯 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사신(死神)은 그녀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웃는 듯 했다. 먼저 떠나는 길목에서 남은 사람에게 굳이 부담을 주기 싫은 듯 했다.

“약속하마. 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은 반드시 하마. 또한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게 죽일 것이다.”

백도의 약속을 들었음일까? 아니면 백도를 믿고 있다는 뜻일까? 그녀는 웃었다. 무서운 고통이 그녀의 육신을 지배하고 죽음이란 막연한 공포가 그녀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었다. 어차피 복수를 위해 버린 삶이었고, 제대로 피지 못한 꽃이 지고 있었다.

그녀의 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백도는 그녀를 꼬옥 안고 있었다. 그녀의 시신이 차갑게 변해 갈 때까지 그는 그녀의 시신을 놓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아무 말 없이 숙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내 탓이오.”

함곡이 음울한 표정으로 탄식을 내뱉듯 말했다. 그녀들을 요긴하게 서먹은 것은 함곡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안전은 배려하지 못했다. 단지 비밀통로로 움직이면 그녀들이 안전할 것이란 안이한 생각을 했다.

“흐흐. 누구를 탓하리오. 어차피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든 일 아니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하겠소? 십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엽락명이 나를 죽이려 했는데......”

곽정흠의 자조어린 목소리였다. 엽락명의 추적을 간신히 따돌리고 생사림으로 들어와 함곡 일행들과 만난 그는 잠시 혼절했었다. 함곡일행 중에 의술에 정통한 이가 없다보니 단지 지혈을 시키고 막힌 진기를 원활하게 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곽정흠의 내력이 탄탄하다 보니 그 정도만으로도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던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진 그의 한 마디는 효과가 컸다. 지금 이 순간 당화나 홍교의 죽음으로 함곡이 흔들리면 안 된다. 모든 계획이 함곡의 머리에서 나왔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것 또한 함곡이 나서서 진두지휘해야 한다. 자신의 몸이 말이 아니면서도 함곡을 두둔하고 나선 이유였다.

“맞는 말씀이오.”

백도는 함곡을 탓하지 않았다. 탓할 것이 아니었다. 무림에 몸담고 있는 자라면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남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백도는 홍교의 시신을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혀 놓았다. 죽어 고개를 늘어뜨린 그 모습은 어둠 속에서 매우 흉측스럽게 보였지만 죽은 상태에서도 이 운중보 내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앉은 자세로 보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엽락명도 장인을 찍은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말했던가?”

풍철한이 나직한 목소리로 함곡에게 물었다. 함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렇다면 그 자가 그 비밀통로인가 하는 것을 알려준 모양이군.”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네. 또 다른 인물이 그랬을 수도 있지.”

함곡의 말에 풍철한은 검미를 치켜떴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엽락명 말고도 배신할 작자가 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오. 나 역시 비밀통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오. 그런 점에서는 그 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대답은 곽정흠이 했다. 경비 책임을 맡고 있었으니 비밀통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고, 또한 일부 알고 있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는 엽락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말이었다.

“빌어먹을.... 이제 어찌할 셈인가?”

함곡이 곽정흠의 말을 시인이라도 하듯 아무 말을 하지 않자 풍철한이 따지듯 물었다. 공모한 자 중에서 벌써 한 명이 배신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있을 수 있다는 말은 모든 계획이 어느 한 순간 완벽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함곡은 또 다른 누군가를 의심하는 눈치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시작된 이 일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았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져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공모한 인물들이 함곡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이 거사를 위하여 공모하고 공모자를 결성한 것은 자신들이었고, 함곡이 지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사실 이 자리에서 함곡에게 따질 인물은 풍철한 밖에 없었다. 풍철한과 그 형제들은 이 거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저 보주의 부름을 받고 들어왔을 뿐이었고, 그가 부탁받은 일은 철담의 살해범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꼬인 것은 자신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설중행을 동행하게 된 것이었고, 재수 없는 함곡과 같이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풍철한으로서는 아주 일이 꼬여도 더럽게 꼬인 셈이었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나? 이미 선택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모두 내 탓으로 생각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겠지.”

함곡이 사뭇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풍철한과 그 형제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다만 일이 이렇게 틀려진 것은 혈서가 그들에게 발각되었다는 점이네. 그것으로 인해 오늘밤 실행하기로 한 중대한 계획이 모두 틀어져 버렸고, 또한 오히려 이렇게 희생자만 남기고 쫓기게 된 것이네. 그렇다고 종대협을 탓하는 것은 절대 아니네.”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어도 생사판 종문천이 목갑을 가져오지 않는 바람에 혈서가 발각된 것이었고, 종문천은 함곡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했지만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자네가 손을 떼고 이곳을 떠난다 해도 나는 자네에게 야속하다 말할 자격이 없네. 하지만 나는 자네가 도와주기를 바라네. 저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이제는 어떠한 이점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매우 힘든 싸움이 될 것이네.”

풍철한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함곡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곡은 매우 자존심이 강한 친구였고, 당장 죽는다 해도 저렇게 사정할 친구가 아니었다.

#천지#무협소설#연재소설#이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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