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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휴가를 신청해서 결재를 다 내놓고 ‘남겨진 일을 마저 다 정리해야지’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퇴근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손보다 마음이 더 바빠졌다. 이미 계획된 휴가가 하루가 미뤄진 상태였지만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 휴가 일정을 높은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 한 퇴근 30여분을 남겨두고 전화가 따르릉 울렸다. 그리고 금방 끝나지 않을 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휴! 휴가 갔을 때 그랬으면 큰 일 날 뻔했네"라며 위안을 삼는데 이번에는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 마무리를 하려는 계획이 마치 집중호우로 내린 거대한 물이 휩쓸고 간 도랑의 쓸린 잡초처럼 처절하게 누워버린 풍경을 보는 것 같이 내게서도 힘이 쫙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간힘을 쓰며 이건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하루쯤 더 휴가를 미룬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다음날 퇴근시간의 그 조마조마함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사무실 앞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지.

동해의 푸른 바다에서 아이들이 쉴 새 없이 소리치고 난 모래속에서 낮잠을 즐기는 상상을 하는데도 초록 신호등이 켜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바심을 태워도 또 어느 순간엔 다 지나버린 추억이 될 텐데. 좀 느긋해지자고 마음을 달랬다.

친구들은 아침에 이미 동해로 떠났고,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출발했다. 이제 더 이상의 시간을 침해받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을 알았는지 손 전화도 내내 조용했다. 차에 올라 늘 듣던 음악과 라디오도 끄고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짧아진 휴가만큼 뭔가 이번 휴가는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번 휴가는 매년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니거나 친구들과 뭉쳐서 모아놓은 경비를 써가며 여행을 했던 것과는 달리 한적하고 좋은 곳에 머물다가 오는 것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숙소에 가면 아마도 아이들과 얘기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좀 무거운 주제로 시작했다. 늘 웃음을 끼고 사는 아이들이라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과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많은 일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주었고, 각자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했다.

나의 이런 제안과 설명에 처음엔 소극적이던 아이들이 각자 제 생각들을 조금씩 쏟아냈다. 5학년 민정이는 역사에 관해서 관심이 아주 많다. 역사드라마의 앞으로의 전개과정에 궁금증이 생기면 모두 민정이에게 물어본다. 자연관찰 탐구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전국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다.

그런 민정이는 자기가 앞으로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고 그날 할 일들을 미루는 습관을 고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4학년 동규는 누나가 말 할 동안 약간의 빈정거림과 놀림이 평소처럼 있었지만 역시 누나와 비슷하게 약속을 했다. 그러는 동안 밤바다가 펼쳐진 동해에 닿았고, 장을 본다는 핑계(?)로 마중 나온 온 친구들과 만나 우여곡절을 겪은 휴가가 시작되었다.

휴가는 그야말로 휴가로 보내기로 작정을 했으니 모든 일상을 잊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진도 거의 안찍고 하루 종일 실내 수영장과 바닷가를 오갈 수 있는 한 가한 곳에서 늘어지게 시간을 보냈다.

마음 졸이며 퇴근시간을 맞던 전 날의 기억과 초록신호등을 기다리던 순간에 생각했던 그 일들을 모래 속에 몸을 묻고 다시 되 씹어 보았다. 입가 웃음이 흘렀는데 누가 볼까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 개인의 시간이 이렇게 역사가 되고 그런 개개의 역사가 모여서 모두의 역사가 되는 것이리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보냈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상의 시간을 잊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아쉬운 만큼만 빼면 거의 모두가 여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간히 모래사장에서 울리는 폭죽소리를 들으며 해산물 가득한 저녁까지 먹고 숙소에서 뽀송뽀송한 에어컨 바람에 이불까지 덮고 모두들 단잠을 잤다.

아쉬움에 속초 시립박물관에 잠깐 들른 것 빼고는 다시 집 근처로 와서 냇가에서 플라이 낚시로 다시 한번 비워낸 마음을 다시 gpd궈냈다.

게릴라성 호우가 마치 폭탄처럼 퍼붓는 날을 보다 하루 먼저 움직였고, 하루 먼저 돌아와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었던 행운도 떠나기 전의 준비(?)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되어 진다. 연초록 솔방울이 예쁘게 주렁주렁 매달려 싱싱한 솔 숲 공원을 걷다가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이렇게 여름휴가의 추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욕심을 비워낸 덕분이 아닐까.

앞으로의 휴가는 채우려는 것에서 버리려는 휴가로 바꾸어야 할 듯싶다.

▲ 휴가 마지막에 일행이 헤어짐이 아쉬워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밝은 표정이 휴가 동안 백치(?)가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 김영래

덧붙이는 글 | 휴가에 관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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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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