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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책 표지
<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책 표지 ⓒ 검둥소
돌아보면 전쟁은 까마득한 과거의 일만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한국전쟁 당시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전쟁 속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자란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을 해서 나를 낳았다.

어린 시절의 내 기억 속에도 전쟁은 남아 있다. 둘째 삼촌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것이다.‘이제 떠나면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서 올지 모르겠다’는 삼촌의 편지를 움켜쥐고 울던 할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다행히 삼촌은 살아서 돌아왔다. 라디오, 전축, 통조림, 설탕, 화장지, 짭짤한 미제 과자 등 온갖 신기한 물건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삼촌이 돌아온 뒤 며칠간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 잔치를 했다. 소 잡고 돼지 잡는 잔치는 아니었지만, 시루에 떡 찌고 술 빚어 나눠먹던 잔치였다.

그 뒤로 한동안 삼촌 방에 누워 월남 얘기 듣는 재미로 살았다. 베트콩과 총싸움 하던 얘기, 동굴로 숨어버린 베트콩 잡으러 들어갔던 얘기, 사로잡은 베트콩 얘기, 피 흘리며 죽어가던 베트콩 얘기…. 같은 얘기를 돌아가며 되풀이해주는데도 재미있어 자꾸 해달라고 졸랐다.

삼촌의 월남 얘기가 끝난 건 삼촌이 결혼한 직후였다. 따로 집을 구해 나간 게 아니라 우리 집 사랑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눈치도 없는 조카 녀석이 신혼 방을 수시로 들락거렸으니 꽤나 얄미웠을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에게 월남 얘기 해달라고 졸랐다. 조카의 성화에 못 이겨 삼촌은 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함께 얘기를 듣던 새색시가 얘기를 듣다 기겁을 한 것이다. 그 뒤로 다시는 월남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의 저자 사토 다다오는 소년병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전시라는 분위기에 휩싸여 무언가 실수할 때마다 “네 충성심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란 꾸지람을 들었던 소년 사토 다다오는 충성심이 부족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로 간 것이다.

열 네 살의 해군 소년병 사토 다다오는 1945년 8월 패전을 전후해서 전쟁과 상관없는 땅굴 파는 일이나 뽕나무 밭을 감자 밭으로 바꾸기 위한 작업에 매달렸다. 학교에서와는 달리 실수할 때마다 무수히 매를 맞고 혹독한 벌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사토 다다오는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안고 살아왔다. 동서양의 무수한 전쟁을 돌아보면서 전쟁 속에 숨겨진 본질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침략이라 여기지 않고 침략 대상국 사람들을 구원해주기 위한 것으로 선전한다. 조선과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조선과 중국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선전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니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그 외에도 많았다. 프랑스 혁명 뒤에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자유주의 확산의 명분으로 유럽을 침략했고,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나무묘법연화경’이란 깃발을 들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은 국가가 내세운 명분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에 반하는 대상은 제거해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믿게 된다. 잔학한 행위조차도 약소국의 지도를 위해,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처럼 정당화시킨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한 나라보다는 식량도 물자도 풍부한 국가가 더 많은 것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많은 걸 가진 국가들이 더 많은 자원과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전쟁의 본질을 폭로한 사토 다다오는 평화의 길을 열기 위한 제안을 한다. 더 많은 것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하는 현실이 전쟁의 원인이 되기 쉽다. 가난한 나라,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우정을 쌓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를 위한 학문, 평화를 위한 학습으로 삼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 시절 삼촌에게 들었던 베트남 전쟁 역시 사토 다다오가 얘기하는 전쟁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국군이 파병되었지만 그 전쟁 속에서 일어난 진실은 오랜 기간동안 묻혀 있었다. 피해가 아닌 가해의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1930~40년대 저지른 일본군에 의한 가해의 역사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돌아보면 우리 역사 속에서 전쟁은 쉼 없이 이어졌다. 동학농민전쟁, 항일의병전쟁, 독립군의 독립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현재의 아프칸과 이라크 파병까지.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전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전쟁도 있었다. 강제 징병의 대상이 되어, 국익이란 명분으로, 강대국의 의도에 끌려 전쟁에 가담했던 경우도 있다.

아직도 한반도에선 전쟁의 그늘이 드리워있다. 냉전의 논리가 여전히 살아 휴전선을 사이로 긴장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우리 후손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전쟁이 아닌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평화운동은 전쟁의 그늘이 드리워진 한반도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전 선언이 이루어지고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로 바뀌어야 한다. 사토 다다오의 책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사토 다다오 지음, 설배환 옮김, 한홍구 해제, 검둥소(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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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과의 가상인터뷰

#휴전선#소년병#태평양 전쟁#베트남 전쟁#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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