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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 이희동
몇 년 만에 타보는 춘천행 열차인가. 비록 지나다니는 매점 아저씨와 빈 좌석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석이었지만 춘천을 향하고 있다는 그 자체에, 그리고 정겨운 지명이 창밖으로 언뜻언뜻 비친다는 사실에 마냥 즐거운 춘천 가는 길이었다. 실내에서는 약동하는 젊음이 시끄럽고, 복도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열정이 뜨거운 경춘선.

칙칙폭폭. 비록 완행열차는 아니었지만 무궁화호는 꽤 많은 역에서 정차했다. 덕분에 춘천 가는 길은 늦어졌지만 그것에 불만스러워하는 이는 없어 보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춘천을 가고 있지 않은가. 가는 걸음 그 자체가 여행이 되는 그곳.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빨리 달리기 보다는 오히려 천천히, 지나온 발걸음을 되돌아보고 싶어 오른 춘천 가는 길.

물론 새마을호도 모자라 KTX가 각광받는, 무한대의 속도만을 절대적으로 맹신하는 오늘날 무궁화호의 존재는 퇴출되지 못한 구시대적 유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장소에 갈 때 하나같이 그 시간의 축약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이 길을 찾아 길을 나선 사람도 있을 것이며, 철로 위에서 마음을 정리하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것이 진보라는 생각에 익숙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 각인된 편견인지도 모른다. 느림이 갖는 여유는 우리에게 영감을 일으키기도 하며 그 여유 속에서 시작된 반성은 우리의 삶을 더욱 튼튼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이 시대의 번잡함과 천박함은 오히려 그 성찰 없는 빠름의 추구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궁극의 영문도 모른 채 목적을 위하여 무조건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들의 자화상.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싱그러운 삼림. 그리고 철로를 따라 흐르는 진녹색의 강물. 평화롭고 나른한 풍경을 하염없이 보고 있자니 어느새 청평, 대성리, 가평이었고 그때마다 한 무더기의 젊음들이 왁자지껄 짐을 꾸렸다. 또다시 떠오르는 10년 전의 내 모습.

▲ 춘천에 다 왔음을 알리는 김유정 역.
ⓒ 이희동
강촌을 지나고 나니 열차 안은 조용해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내렸고 이제는 춘천 집을 향해 가는 이들과 나와 같은 과객만이 자리를 차지할 뿐이었다.

열차의 종착역은 현재 공사 중인 춘천역 대신 남춘천역이었다. 아마도 공사는 드라마 <겨울연가> 등을 통해 부쩍 증가한 관광객 유치를 위해 기존의 역사를 확대하는 것이리라. 돈이 된다 싶으면 무조건 개발하고 확대해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사고방식은 언제쯤이나 극복할 수 있을는지.

춘천 가는 기차에 실려 그 종착역까지 왔지만, 막상 남춘천역에 내리니 가장 큰 문제는 그 다음 딱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춘천까지 가는 길만을 바랐을 뿐, 정작 춘천은 내게 젊음과 청춘의 이미지가 전부였던 것이다. 물론 레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갈 곳 천지이겠지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둘러보는 것이 취미인 내게 춘천은 그다지 친절한 곳이 못되었다.

춘천 관광책자는 당장 소양호와 청평사, 그리고 춘천닭갈비와 막국수를 제안하고 있었지만 이미 몇 번이고 다녀온 그 코스를 또 밟고 싶지는 않았으며, 그렇다고 수많은 광고들을 따라 남이섬과 같은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를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춘천의 원활치 못한 대중교통으로 그 시간에 그 곳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도 했다.

어디를 갈까. 결국 내가 택한 곳은 춘천시내 중앙에 위치한 봉의산이었다. 관광책자를 보니 춘천의 명소로서 손에 꼽힐까 말까한 곳이었지만 지도를 보아하니 춘천의 정 중앙에서 진산 노릇을 하는 곳이었다. 서울 남산처럼 그곳에 오르면 춘천의 모든 전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려니. 게다가 그 주변으로는 춘천의 자랑 소양정과 '소양강 처녀' 기념비도 있다지 않은가.

미디어가 만든 청춘과 낭만의 이미지

갈 곳을 정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난 곧장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고 예전 닭갈비를 먹었던 중앙동에서 내려 무작정 높은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나오는 것이 길이며, 그 길은 아마도 모두 진산과 통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역 속에서 진산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 춘천의 일상.
ⓒ 이희동
봉의산에 가까워질수록 춘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생각해오던, 호반의 도시로서 윈드서핑하는 젊은이들이 북적대는 춘천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강을 옆에 끼고 형성된 오래된 촌락들이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지난한 일상들의 흔적이었다. 미디어가 만든 청춘과 낭만의 이미지에 갇혀 춘천 역시 사람 사는 곳임을 잠시나마 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파트 숲을 벗어나 봉의산 자락에 도달하자 그곳에는 허름한 가옥들이 꽤 가파른 터에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었다.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철거촌으로 나왔던 그런 공간. 옆의 아파트촌과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서 일조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곳 주민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한끝차로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지 못한 자신의 불운에 대한 비관일까 아님 주거공간이 투기의 수단이 되어 '재테크'라는 국적불명의 개념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대한 불만일까?

▲ 봉의산 올라가는 길에 만난 두 풍경.
ⓒ 이희동
아무리 낮은 산이라지만 한여름 뙤약볕 아래 산을 오르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가쁜 숨소리는 다시금 내가 이제 이십대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봉의산 정상. 그러나 언뜻언뜻 호수만 보일 뿐, 우거진 수풀로 인해 춘천 시가지는 볼 수 없었고 꼭대기에는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방송 송신탑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춘천이 광역시 정도라면 당장에 개발되어 서울의 남산마냥 춘천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을 봉의산이었지만, 춘천이 가진 지역적 위상은 봉의산을 가까운 주민들의 동네 뒷산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느지막이 개 한 마리 끌고 나와 산책을 하면서 운동도 하며 소일할 수 있는 그런 공간.

춘천의 전경을 볼 수 없다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소양정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산을 뺑 돌아갈 것 같은 등산로를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지름길로 들어섰다 싶었지만 그것은 산짐승의 흔적이나 물이 흘러 생긴 자국일 뿐, 결국 난 길도 없는 야산을 미끄러지다시피 해서 여기저기 긁히며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그 산 밑에 소담하게 자리하여 길을 잘못 든 등산객을 맞이해준 소양사가 왜 그리 고맙던지.

▲ 봉의산에서 바라 본 춘천의 풍경.
ⓒ 이희동
어렵사리 산을 내려와 소양강변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있자니 도로 건너편에 그럴듯한 느티나무와 평상이 보였다. 그 위상과 위용을 보아하니 꽤 오래전에 동구 밖을 지키는 영험한 역할을 했을 것 같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그 나무 옆에는 이승만 박사가 이곳에까지 와서 식수를 했다는 표지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아마도 '이승만'의 신화는 이미 존재하던 나무에 대해 권위를 부여키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리라. 세월이 흐르면 마의태자처럼 이승만의 지팡이가 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골목에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비극

차마 평상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신발을 벗고 올라가 유유히 흐르는 소양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40대 초반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소주에 안주거리를 가지고 평상을 찾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낮술에 취하면 애비도 알아보지 못한다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소주를 병째 마시기 시작했고 역시 서슴없이 내게 한 모금 권하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슨 사연이 있어 춘천에 온 것 같은데 술 한 잔에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리라는 친절한 한 마디와 함께.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여행의 진 맛은 어차피 처음 보고 듣고, 처음 겪고 접하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은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전국 곳곳을 근 1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은 이런 경우 고마워하면서 기꺼이 신세를 지라는 것이었고, 또 나중에 그만큼 베풀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잔도 없는 소주를 들이키며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을 소양강의 어부로 소개한 그는 스스로를 시간을 낚는 강태공과 비교하며 춘천이란 곳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공간인지, 또 얼마나 살만한 곳인지 강변하였다. 강바람이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시원하게 불고 있었으며, 뒤이어 올라간 소양정에서도 강바람은 계속 불어댔다.

▲ 오래된 나무와 평상.
ⓒ 이희동

▲ 잔 없는 소주와 안주.
ⓒ 이희동
이제 실실 서울로 올라갈 시간, 약간의 취기와 함께 다시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용한 골목에 초등학교 1, 2학년 쯤 되어 보이는 세 꼬마가 딱지를 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문뜩 어렸을 적 이 시간에 동네서 친구들과 죽어라 공을 차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토요일 오후 이 시간이면 꽤 많은 아이들이 뛰어놀 시간이건만 겨우 셋이서 딱지 치는 모습이라니.

물론 예단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새삼 대도시를 제외한 공간에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춘천이면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이건만 골목에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은 비극이었다. 뭐, 물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학원을 갔을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비극임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 딱지치기 하는 아이들.
ⓒ 이희동
서울로 가기 전 마지막 강바람을 쐬고자 강변으로 다가갔다. 강가에는 가요 '소양강 처녀' 노랫말이 적혀있는 비가 서 있었고, 강 중간쯤에는 소양강 처녀를 형상화한 듯 생뚱맞은 처녀상이 하나 서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명물을 만들어 그 지역의 관광 사업에 일조하겠다는 관료들의 얄팍한 술수였으며, 또한 자연을 그대로 즐기기보다 인위적인 그 무엇이 첨가되어야만 하나의 볼거리로 인식하는 시대정신의 결과였다.

처녀상 앞에서 좋아라 사진 포즈를 잡는 이들을 뒤로 하고 서울로 향했다. 더 이상 기차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집에 좀 더 빨리 도착해 쉬어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봄부터 무슨 열병인 냥 앓았던 춘천에 대한 미련은 그렇게 마음 한 편에 제쳐둔 채. 아마도 나중에 삶이 고단할 때 난 또 춘천에 대한 기억을 살포시 꺼내들 것이다. 역시 마냥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으로 각색하여.

이모부,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 소양강 처녀와 가요비.
ⓒ 이희동

▲ 소양정에서 바라본 소양강.
ⓒ 이희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춘천, #무궁화호, #경의선, #봉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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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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