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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책 겉그림
<반성문> 책 겉그림 ⓒ 랜덤하우스
어린 시절 잘못했을 때 쓰는 게 있다. 반성문이 그것이다. 선생님의 강요든 부모님의 요청이든 그것을 쓰곤 했다. 때로는 너무 많은 반성문을 쓴 것 때문에 팔조차 아플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썼던 기억 때문에 반성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인생의 자산일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그것을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거짓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 사회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특히 자식들 앞에서 수치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으로 반성문을 썼다고 자족할 뿐이다.

이철환의 산문집 <반성문>은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 사회를 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른바 학원 선생님이 명강의를 하는 까닭에 학생들로부터 서울대 출신이라는 명성까지 누리지만 그것에 대해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실업계를 나왔음에도 현재 누리고 있는 명성을 지울 수가 없어서 밝히지 못하는 경우다.

또 있다. 군부독재 시절 모두들 시험을 거부하면서까지 항의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자신은 시험을 보며 장학금을 타야만 했던 그 현실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일이 그렇다. 독재 정권보다 장학금에 더 고달팠던 그때의 일을 솔직하지 털어놓지 못한 게 후회스러운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과 명분 없음을 핑계 삼아 나는 시험장으로 갔다. 낡은 군화를 신고 폐차장에서 막일을 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열 명도 채 오지 않은 학생들 틈에 앉아 나는 쪽 팔리게 시험을 봤다. 남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시험 보는 내내 얼굴이 홧홧거렸다.”(102쪽)

그러나 어디 반성할 게 자기 자신에게만 있던가? 내가 내뱉은 말로 인해 상처를 주는 경우도 많다. 나의 잘못된 습관으로 누군가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일들도 허다하다. 밤송이와 아카시아 같은 나무들의 가시만 본 채 그 속에 들어 있는 진주 같은 장점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에만 머물러 있는 나의 시선과 나의 말투가 문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나도 반성문을 쓰고 싶은 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인터넷 홈페이지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 카페지기인데 내가 속한 단체를 비판한다는 느낌을 받은 나머지,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한 채 내 임의대로 삭제해 버린 게 그것이다. 지금은 무척 미안한데, 때가 되면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있다면 중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시장터에 나와서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두고, 친구들에게 부끄러울까 봐 나는 ‘울 엄마’라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리 사춘기 때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도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움으로 남아 있다. 이 부분도 더 늦기 전에 어머니에게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지난한 삶은 삶의 비의를 가르쳐주고
삶의 감사를 가르쳐준다.
달개비꽃처럼 멍든 가슴으로도 우리는 사랑을 배운다.
반성과 겸손을 통해
우리는 세상과 대결하는 방식을 배운다.”(162쪽)


<연탄길>을 쓰면서 7년간 과로한 탓에 1999년부터 지금껏 8년 동안 귀에서 전기톱으로 쇠를 깎는 소리가 들린다는 작가 이철환, 거기에 어지럼증과 불면증 그리고 자살충동까지 느꼈다는 그. 그 현상을 보통 사람 같으면 그저 과로로 단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데서 이유를 찾고 있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부분이지 않겠나 싶다.

그것은 자신이 쓴 책의 인기로 사람들에게 더 큰 박수를 받는 일에 한없이 매달릴까 봐, 잘 쓴다고 고갯장단을 맞춰주는 사람들을 위해 혹여 글 같지도 않은 글을 미친놈처럼 써 댈까 봐, 그리고 더 많은 인세에 탐을 낼까 봐,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아보도록 고통을 준 것이라고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진지한 자신의 반성문이 어디에 또 있을까?

반성문 - 이철환 산문집

이철환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7)


#반성문#이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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