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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랑이라는 것을 찾을까? 왜 사랑이라는 것을 할까? 거기에는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랑이라는 것을 찾을까? 왜 사랑이라는 것을 할까? 거기에는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일까? ⓒ 시네마서비스 (영화 국화꽃 향기 中)
3. 그렇다면, 조건을 통해 고독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그 깊은 내면 가운데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은 다시 말해 영원함, 온전함, 참됨 그리고 무한한 이해와 용납이라고 하는 no where의 관계이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과 명예와 자랑할만한 직업과 이를 통해 얻어지는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 그리고 만족감은 너무도 변화무상하여 결코 영원하지 아니하고, 인간이라고 하는 변덕스러운 존재들이 보내는 찬사와 호의는 불변의 신실함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변덕스럽고 변화무상한 것에서 온전함을 기대할 수는 없고, 참다움을 구하기에도 차원이 너무도 다르다. 무한정의 이해와 용납도 마찬가지로 도저히 구할 수 없다. 돈, 직업, 외모 등의 조건 즉 어떤 힘, 권력을 통하여는 당장 호의와 존중을 살 수 있을 뿐 그것은 언제 갑자기 깨지고 사그라져 버릴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유리성과 같다.

게다가 호의와 존중을 유지하려면 어떻게든 끊임없이 좋은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 단점을 보인다거나 실패한다거나 실수를 하면 바로 game set, get out이 되고 만다. 진정 무제한, 무한정의 이해와 용납이란 명과 암을 모두 드러내고도 이해받고 용납받는 것이다.

연약함과 흠까지도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이대로 이해받고 용납받는 것과, 물질과 조건과 매력적이고 흠잡을데 없는 훌륭한 모습 같은 것으로 호의와 존중을 사는 것 간의 차이는 빛과 어둠 사이의 거리쯤이 되겠지.

4. 세상, 사회, 만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no where의 관계. 그래서 그런 no where의 관계 대신에 물질적 성공 등의 방식으로 세상과 사회와 만인으로부터의 호의와 존중을 구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진정한 해갈이 아님을 깨닫게 된 인간은 깊이 상처받고 더욱더 고통하게 된다.

이제 이렇게 세상의 한편에서 상처입고 고통하는 한 명의 여성과 또 다른 한편에서 역시 상처입고 고통하는 한 명의 남성이 어느 날 문득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어떤 묘한 운명에 의해서이거나 혹은 마주친 상대방의 눈빛에서 어깨에서 그의 상처와 아픔을, 서로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서로의 닮은 모습을 알아보게 된다.

상처입고 외로움과 쓸쓸함에 고통 하는 인간과, 역시 상처입고 외로움과 쓸쓸함에 고통 하는 인간이 만나 서로 고통을 이해하며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과 쓸쓸함을 돌보고 어루만진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감싸 안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서로를 살리고, 또 서로를 인해 살게 된다.

이 지상에서는 실로 찾을 길이 없어 보였던 그 no where의 관계가, 상처입고 고통 하는, 외롭고 쓸쓸하고 지친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now here가 되는 것이다.

no where = now here

now here의 관계에서 인간은 그렇게 목말라 하였던 영원불변의 신실함, 온전함, 참됨, 그리고 무제한의 이해와 용납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에 자리하는 그리움과 소망의 실현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어디 먼 다른 차원의 것만 같은 구원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구원이다.

5. 생명은 늘 살고자 한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 사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 그리고 나아가 결혼은 곧 삶과 생명에 대한 소망(esperanza)이랄 수 있다.

여기에서 생명이란 수태와 출산, 2세를 통한 육체적 삶의 연장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랑을 통해 구하는 생명엔 육체적 삶, 육체적 생명뿐 아니라 영적 차원의 생명까지 포함된다.

사랑이라고 하는 now here의 관계는, 외로움과 쓸쓸함과 고독,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함이라고 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부터 영혼을 살리고,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영적 위안과 활력과 기쁨이 된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나 분명 존재하는 영적인 차원의 생존 욕구이기도 한 것이다.

6. 영속성과 신실함과 온전함과 참다움, 무제한의 이해와 용납은 하나같이 지극히 영적인 차원의 것이다. 고로 종교를 갖건 그렇지 않건, 영혼이라는 차원을 믿건 믿지 않건,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인간은 누구나 그 사랑을 구하는 욕구의 바탕에는 영원불변하고 온전하며 참된,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아 이미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받아주는 절대적 존재(Father, Abba)에 대한 그리움(nostalgia)이 자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7. "바로 지금, 바로 여기" now here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유서깊은 그리움과 살고 싶음의 소망. 이것이 바로 사랑의 동력이자 이유이고 목적이 아닐는지.

Love = nostalgia(영원불변 또 불멸의, 온전하고 참되고 나를 알아주고 받아주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그리움) + esperanza(살고 싶음의 욕구, 소망)
#사랑#도토리#목적#LOVE#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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