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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집 근처의 식당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의 마무리에 골몰했다. 술을 마시면서 창작을 논한다는 것이 일견 우습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술은 유일한 카타르시스였기 때문에 작품을 핑계 삼아 술을 즐기고 싶었을 터였다. 두툼하게 썰어 넣은 돼지고기가 먹음직한 김치찌개를 안주로 거반 한 병을 거의 비울 무렵, 식당의 케이블 TV에서 명품 손목시계가 나왔다. 그것을 본 나는 사약을 삼킨 것처럼 쓰게 웃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26년 전의 이맘때였다. 공고를 고교를 졸업하고 나름대로 사회생활에 적응할 무렵, 동창생 하나가 군대에 지원하여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막소주에 새우깡 안주로 퍼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밤새워 술을 마시는 것이 당시의 ‘입영장정 송별식 절차’였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지만 친구가 살벌한 군대에 가는 판에 술값을 따질 수는 없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을 무렵이어서 나중에는 아예 술집 문을 닫고 술을 마셔대었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필연적으로 술값이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험악하게 생긴 주인아저씨가 내 손목을 가리켰다. 나는 제법 비싼 외제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주인은 일단 그것을 맡긴 다음 나중에 찾아가라는 조건을 걸었다. 거부했다가는 주인은 다음이고 친구들에게 맞아 죽을 판이었다.

무사히 나올 수는 있었지만 술이 완전히 깬 다음 겁이 덜컥 났다. 만일 아버지가 아신다면 큰일이었다.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비싼 시계를 맡기고 술을 퍼먹었다는 것이 들통 나는 날에는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지기 십상이었다. 사무실에 두고 왔다, 친구가 빌려갔다 등등으로 둘러대었지만 그런 식으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든 시계를 찾아야 했는데 알량한 월급으로 해결 날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 찾아주기로 했지만 겨우 돈이 마련되면 그 돈으로 다시 술 마시기에 바빴으니 그래 가지고는 시계를 찾을 가망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방에 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내가 막노동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딱 한 달만 일하면 시계 값은 물론, 부모님 보약 값까지 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툭하면 월급이 밀리기 일쑤인 데다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던 설계사무실은 어렵지 않게 그만 둘 수 있었다.

그런 경로로 시작한 막노동은 대단히 힘들었다. 하마터면 포기할 무렵 친구가 손을 써서 훨씬 수월한 전기 팀에 배속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가야할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이었다. 훌쩍 한 달이 지난 다음 생전 처음 보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돈을 타던 날 친구와 크게 술을 마셨다. 진저리치는 막노동은 다음 날로 끝이었다. 그제야 아주 수월한 나의 자리가 본래 그 친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밤 새워 술을 마시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정말 좋은 친구였다.

다음 날 아침 그만 두겠다고 말했는데, 팀장님이 ‘지금 대단히 바쁜 시기니까 한 달만 더 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일당을 올려준다는 옵션이 제공되자 눈 딱 감고 받아들였다. 친구는 미래를 위해서는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설계사무실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지만 거기의 알량한 봉급보다는 여기의 확실한 일당이 백번 나았다. 좋은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싫었고 비록 소주와 막걸리라도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다시 시작한 한 달이 1년이 되고 그것이 10년으로 연장되었다. 다시 10년이 지나자 가족을 건사하는 어엿한 가장이 된 데다, 이제는 팔자에도 없던 작가가 되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앞날이다.

나로 하여금 노동을 하게 만든 손목시계는 영영 찾지 못했다. 그때 술값이 충분했었거나 친구들이 돈을 모아 시계를 찾아 주었다면 내 인생은 현재의 형태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에 크게 감사한다.

#손목시계#막노동#술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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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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