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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먼저, 아프간 인질들 가운데 최근 비극을 당하신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그 유가족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지금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거나 하는 뜻이 전혀 아니고 순전히 '신앙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비극을 당하신 두 분은, 신앙심이 정말로 각별하셨던 분들로 알려졌습니다. 약하고 힘없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생전에 많이 펼쳤다고 하고요. 이번에 아프간에 가신 것도 사심없는 봉사정신과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한 것으로 봅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충직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애썼던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들은 분명 어여쁜 신자들이었을 것임이 분명할 터입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 인간들의 눈에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모두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이뤄진 일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영혼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서 그 곁에서 천국의 복락을 누리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제가 도무지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생기더군요. 왜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하는지요? 그들이 아프간에 간 것이며, 그곳에서 당한 일 모두 주님의 큰 뜻에서 이뤄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착하고 충직한 종임을 인정받아 주님 곁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게 왜 비극인지요?

심지어 신심 깊은 교회의 목회자들마저도 '비극'으로 묘사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는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이번의 일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승화해야 하나요? 정말로 비극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아니면….

제발, 신앙적인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부디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 고통에 민감하지 않고는, 저 지극히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 A Mel Gibson Film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中)
A. 그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신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또 사람에게 영이라는 것이 있고 그러므로 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닐지라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세상에서의, 우리 피부에 와 닿고, 우리 가슴으로 느껴지는 고통과 아픔, 상처를 무시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조차 십자가에 달려, 그 수난 가운데 고통에 겨워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었고, 그 고통과 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님을, 영광된 부활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절규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고통, 아픔, 상처라는 것이, 우리가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겪는 슬픔과 고뇌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토록 큰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육신을 입은 까닭에 겪어야 하는 아픔과 상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 땅에서의 아픔, 상처, 고통을 가벼이 여기고, 내세만을 지향하는 것은, 지하드를 외치며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이 갖는 생각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위로, 파괴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 아픔, 상처에 몸부림치게 될지를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들, 무고한 이들이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서 절규합니다. 이것이 어찌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십자가 사역조차, 비록 그가 부활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내었으나, 그 수난의 과정에서 겪는 폭력과 괴로움, 고독, 비참함은 그 자체로 비극인 것입니다.

종교와 믿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에서의 고통을, 비극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과 행복, 천국 등의 것은 이 땅과는 무관하고, 우리 삶은 육신을 입은 채로는 고통스럽게 지낼 뿐이다가, 내세에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것"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지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또한 이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저 구름 위의 천국이라던지, 죽음 뒤에 이를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현재와는 무관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자리에서 이뤄가야 하는 것, 내 마음과 내 삶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란 청년 예수가 이 땅을 거닐 적에 보여준 삶의 모습, 그리고 또한 그런 그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을 거닐 적에 보여준 삶의 모습의 많은 부분은, 지극히 약한 자들에 대한 애틋함이었습니다. 긍휼과 사랑과 보살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아픔의 공감은 현실의 고통에 민감할 때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 혹은 양심이라는 것이 욱신거릴 때가 있습니다. 나 혹은 다른 누군가의 아픔에 직면할 때에 그렇습니다. 불의와 고통을 목격할 때에 그렇습니다. 그런 반응은 내가 그래야겠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비보를 접하고서 사람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고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과 영, 양심의 자연스런 반응이 물음에 답해줄 것입니다.

태그:#기독교, #믿음, #신앙, #아프간,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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