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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7월 5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시위에 참가한 박옥련 할머니
ⓒ 김동원
할머니의 이름은 박자 옥자 련자, 박옥련 할머니입니다.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으십니다. 1919년에 태어나셨다고 하시니까 우리 식으로 하면 올해 나이가 여든 아홉이십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허공을 여기저기 짚으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서 살았던 곳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몰라. 그런데 거기에 토인들이 살거든. 여기는 경찰서고, 여기는 우리 집이여. 여기는 신작로여…. 가끔 높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중위, 대위, 그런 사람들이 와서 차에 태워갖고 그랬어. 바나나밭으로 데려가곤 했어…. 46명이 들어갔는데 다 죽고 4명이 살아왔어.”

"그 네 명 중 하나가 전라도 광주가 고향이라는 오형순이야. 우리가 여러 해 데모(수요시위)를 하는 데도 한번도 안나와. 여기 들어올 때 광주와서 찾으면 다 안다고 그 지랄혀디. 그 이름이 위안소에선 하나코였어."

"언제 광주가서 한번 일일찻집을 했거든. 스님이 마련했지. 가서 공무원들 한테 물으니 아무도 모르데. 광주 오금동 오형선이라고 했는데 공무원들이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히여. 그런데 절대로 모르는 거야. 그래서 여지껏 거기서 살아 돌아온 아이들 한번도 못봤어. 그때 한국으로 함께 귀국한 사람들을 다시는 못만났어. 에휴, 그것들을 보면 참 우리 어미보다도 반가울 텐데."

할머니가 어딘지도 잘 모른다고 했던 그곳은 사람들이 밝혀낸 자료에 따르면 파푸아뉴기니의 라바울 위안소였습니다. 하지만 내겐 위안부 시절의 삶을 들려주던 할머니의 얘기보다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할머니의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내가 처음 박옥련 할머니를 본 것은 2006년 6월의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날 난 어떻게 인연이 닿아 가까운 곳에 두고 있으면서도 가보지 못했던 나눔의 집을 찾았고, 그리고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음료를 좀 챙겨가지고 갔었죠. 돌아오려고 나눔의 집을 나설 때 박옥련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 키우면서 사는 게 힘들다는 거 내가 다 알아. 다음에 올 때는 이런 거 사가지고 오지마. 그냥 왔다가 가."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상처로 여전히 당신의 과거가 아픈데 내가 사는 오늘의 힘겨움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그 말이 오늘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 2006년 8월 14일 나눔의 집을 방문한 한명숙 전총리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박옥련 할머니
ⓒ 김동원

덧붙이는 글 | 나눔의 집 홈페이지: http://www.nanum.org 또는 http://www.cybernanum.org
나눔의 집 후원 및 자원봉사 문의 전화: 031-768-0064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수요시위의 시간에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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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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